삼류무사. 나의 글이 삼류이듯 이 삼류무사를 나의 글과 같이 삼류로 대접하면 절대로 안될 작품이다. 삼류무사란다,, 그러나 그 삼류가 아니란다. 제목이 재미있다. 일단 작가의 작명 센스가 맘에 든다.
본 필자가 꼽아보는 三流武士의 특징은
하나, 글의 남성다움이다. (박력 넘침이다.)
둘, 문체의 색다름이다. (대화가 짧고 작가는 상황을 부연한다.)
셋, 주연과 조연이 스스로 살아가게 할 수 있는 개성의 부여이다.
넷, 작가의 약음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이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다.)
다섯, 위의 것이 어우러진 재미가 있다.
그럼 하나 하나씩 필자의 견해를 말하여 보겠다.
이 글은 남성다움이 듬뿍 묻어져 나온다.
작가는 추삼(본 작품의 주인공)을 일반적인 무인과 다르게 창조하고 있다. 그는 다른 무협에 살아있는 무사들과는 그 근본이 다르다. 이름하여 박투....(왜 이런 설정이 필요했을까? 뒤에서 이야기 해 보겠다.) 이점이 가장 남성다움이다. 마치 왜곡되어 알려져 있다 하더라도 일제시대의 우리 주먹들처럼, 몇몇 주먹들이 다구를 사용하기 전의 동경이 배어져 있다. 또한 수절의 주루에서의 무례한 들에게의 한 행동처럼 여러 장면에서 우리는 글을 읽으면서 통쾌함을 느끼게 된다.
이 글의 등장인물들은 말을 아낀다. 그 대신 작가는 연신 상황을 설명한다.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객관적 묘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그게 장황하지만 흥미를 잃지 않게 하는 설명이다. 작가는 대화의 비중을 줄여 등장인물들의 신뢰, 믿음, 등 다른 의사전달수단을 통함으로 이야기는 남성다워진다.
또한 이 글의 설정을 보면 절대오존. 검정오존. 강호십장등 절대적 무위의 무인을 등장시켜 확실한 무협임을 각인시킨다. 이는 주인공이 도전해야할 대상일수도 있음으로 독자들은 그들에 대하여 궁금해 하며 그들의 등장이 기다려진다. 또한 그들의 무공엔 각각의 개성이 넘쳐난다. 화산의 노사는 역시 정통 무가의 제자답게 진중한 성격과 정심한 무공을 선물해 주었고 모추에겐 모추다운 어찌보면 어지러운 그렇지만 정심함에선 떨어지는 천산의 사람들에게는 살기를 어떤 인물들에게도 상황에 맞는 적절한 성격과 그 성격에 맞는 그 성장배경에 맞는 적절한 무공을 주었다. 조연 하나 하나가 주연으로 등장해도 될 만큼 뛰어나다. 많은 글들이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의 대화에 작가의 어투가 가미되어 자세히 관찰하면 일부 작가들의 글은 등장인물들의 행동에는 개성이 넘쳐도 그들의 대화를 보면 생각은 다른데 어투는 별반 차이가 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삼류의 작가는 추삼일 때는 추삼이 되고 단야일 때는 단야가 청완일 때는 청완으로 인물들이 작가가 되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작가가 인물들에게 흡입되어 작가는 단지 추삼의 말을 하운의 말을 타이핑 해 주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인물이 작가의 대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마치 등장인물의 펜이 된 느낌, 작가는 아마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말투를 타이핑 해 놓고 장면 장면마다 숙지하면서 글을 써 나가는가 보다. 일말의 방심이 보이지 않은 구성이다. 이야기의 전개의 개연성도 크게 험 잡을게 없고 이것이 바로 작가 김석진의 최고의 무기이리라. 그들의 행동뿐 아니라 그들의 대화에서도 각자의 개성이 살아 숨쉬는 글, 필자도 이런 글을 감히 써보고 싶다.
이번엔 작가의 약음에 대하여 말하여 본다. 일반적인 무인은 명가의 가르침으로 어려서부터 목표의식을 갖고 무공에 정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만 추삼은 그 무사로의 탄생 과정부터가 색다르다. 그는 어려서 정통무가의 가르침도 받지 못하였고 후 스승에게 사사 받는 시간도 적어서 정상적인 무공의 습득이 불가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추삼의 무공은 여타의 무협의 주인공들과는 다른, 내공의 사용이 필요 없는 방향으로 설정이 잡힌다. 이래서 등장한 대결의 방법이 박투이다. 왜 추삼은 내공을 사용 안하는가? 왜 그의 무공이 기존의 무공과는 다른가?의 의문이 이로부터 해결된다. 물론 작가는 영약이나 기연을 줄 수도 있었으나 작위적인 방법을 배제함으로서 글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기술까지 보여준다. 여기서 간과하지 않아야 할 점은 바로 "추삼에겐 전통적인 무가의 사상이 그에겐 주입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로 고정관념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바탕은 정과사 어느 쪽도 아니다. 이는 달리 말한다면 추삼의 다음 행보가 독자의 상상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런 고도의 전제를 깔아놓은 작가는 아마 절대선과 절대악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훗날 추삼은 어떤 자아를 성립시켜 행동하게 될까? 이렇듯 작가는 교묘한 수법으로 주인공에게 무공도 주고 색갈도 입히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추삼과 함께 행동하고 있는 인물들이 일견 正에 가까운 인물들이라 판단할 수 도 있다. 그러나 대립구도에 서 있는 인물들이 바로 邪일까? 그럼 소림의 행동은? 추삼은 비록 무공은 얻었지만 아직까지 그 무림세계에서의 정체성에 대하여는 백지인 상태이다. 그 백지에 청완이 하운이 색을 칠하여 주고 있다. 그러나 추삼은 기학을 만났었다. 이 기학과의 인연이 어떠한 의미일까? 단지 차후에 완전한 형과 대결시 승리만를 얻기 위한 안배이었을까? 아직까지 추삼에게 색칠해준 인물중 기학의 색채가 가장 진한 것은 아닐까? 그들의 사형제들 또한 악인으로 그려지고 있지만은 아니지 않는가...... 백지 상태의 추삼과 그 위에 색을 입히려고 하는 인물들, 작가는 너무나 약았다. 아마 필자의 생각으론 대 융합을 시도하지 않을까? 한다.
위의 내용이 글의 저자가 약은 하나의 이유이며 두 번째의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마치 이 글은 주말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다시 말하면 결정적인 장면의 맛만 보여주고선 다음 편을 기대하란다. 그 다음편이 언제 올려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독자들은 지쳐간다. 그래서 이 글이 매니아 (댓글을 읽어보면 이 글에 얼마나 집착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 아시게 될 것임)들을 확보하고 있는 것 일수도 있다. 그런데 작가는 기다린 시간을 확실하게 보상해 준다. 항상 독자를 놀라게 할 만한 절대적인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역시 삼류무사야 라는 말을 자아내게 한다. (이건 100% 본 필자의 생각이고 아집일수도 있음을 먼저 말하여 본다. 앞 뒤 글 모두를 말함이다.) 본디 작가는 글을 아낄 줄 알아야한다. 절대적 상황에서 꼭 필요한 글을 이미 먼저 장에서 써먹었다면 작가는 매우 곤란해 질 것이다. 작품의 긴장도를 항상 최고조로 유지할 수는 없기 때문에 작가는 이미 길들어져 가는 (그것이 재미를 추구하는 무협임에야 두말이 필요할까?)독자들에게 어필하려면 더 신선한 더욱 색다른 더욱 통쾌한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면 지금까지 삼류무사는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줬는지도 모른다. 다행인 점은 삼류가 아직까지는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런 100점짜리 장면이 넘쳐나게 되면 독자들이 기대는 더욱 커지고 작가의 창작에 대한 고통은 더욱 가중되어 질 것 같아 약간의 우려가 든다. (이글의 작가는 드라마 작가로 전업해도 성공하겠다..)-특히 무엇을 평하려는 사람들은 글을 아껴야 한다. 결정적 한방으로 자신이 평하고자 하는 글을 표현하려면, 설마 먼저 써먹었던 글을 재탕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 글은 그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하여 아직 단정하기가 어렵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음은 짐작하고 있지만, 단지 사와 마를 멸하고 반대되는 세력을 초토화시키는 과정에서 재미를 추구하는 글은 절대 아니라는 데 본 필자는 과감히 배팅을 하겠다. 아마도 우리가 한번쯤은 고민해 봤을 만한 절대선, 그 반대로 절대악에 대한 고찰을 작가는 시도해 보는 것이 아닐까? 이데아에 대한 고찰, 조심스런 생각을 가져 본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정과사의 규정은 미루면서도 기본적인 예절?에는 민감하다. (남궁 손주의 치기를 다스리고 수절이 무례한 들을 혼내고 하는 점등) 이 점은 글을 읽고서 느껴질 뿐 뭐라 꼭 집어 말하여지지 않음이 본 필자도 본인의 능력의 미진함에 가슴이 아프다. 한마디로 재미와 생각을 동시에 추구하는 글이란 말이다.
마지막으로 긴 글 보잘 것 없는 글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삼류의 가장 큰 힘을 말한다면 주인공을 정과사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탄생시킨, 스스로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게 만들기 위한 작가의 안배, 그러면서도 무공에서 뒤떨어지지 않게 한 작가의 기술과 하나 하나 숨쉬는 작가를 대변하는 조연이 아닌 조연을 대신하는 작가가 될 만큼의 기술이라 본 필자는 생각한다. 이 글은 아직 주인공이 성장하고 있다. 주인공이 지금까지는 배우는 과정이란 말이다. 또한 작품의 특성상 긴 대화가 절제되어 있다. 굳이 하나를 집어내자면 스승의 묘비의 장문이랄까? 작품 전반에 걸쳐 많은 암시를 주는 글 그 글을 추삼이 못 읽었다는 게 더욱 이 작품에 빠져들게 하는 부분이다. 이런 글을 읽을 수 있게 한 작가에게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아하!!!! 작가는 다음작품을 어떻게 우리에게 보여줄까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본 필자는 이 글을 군림천하와 더불어 가장 애착이 가는 근래의 작품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