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 같은 이름을 쓰시는 분이 계시길래 적이 놀랐었습니다.
아무튼 어제는 이래저래 놀랄 일이 있었더랬지요. 다른 놀랄 일이 아주 조금은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 덕분에, 여기 저와 같은 이름을 가진 분을 보고서도 아주 조금은 흥겨워졌더랬지요.^^
그러다가 '음..혈기린외전이라..나도 예전에 하나 써둔 게 있었는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 겨울에 어느 분의 명령(?)으로 써서 보냈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일어서 쓴 게 아니어서 그런지, 아니면 역시나 제 재주가 부족해서였는지, 쓸모가 없게 되어버린 듯 한 '것' 이지요.
그냥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가인'님의 감상문을 읽고, 문득 장난끼가 발동했습니다.
같은 이름으로 같은 작품에 대한 글을 나란히 올리면 어떨까? 싶어진 거지요.^^
.....
아무래도 전 아직 철이 덜들었나 봅니다. 헤헤..
# 좌백의 '혈기린외전' 완결에 즈음하여.
1. 이야기를 떠난 소설.
이른바 현대의 한국소설에서 '서사'는 소멸하였다.
소설의 근간을 이루는 동시에, 그 원형적 의미로서 존중받아 마땅할 '이
야기'의 미덕을, 이른바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더 이상 끌어안지 않고 있
다.
그들은 담론으로서의 소설, 사변으로서의 소설, 자기넋두리소서의 소설
을 쓸 뿐, 더 이상 이야기로서의 소설은 쓰려하지 않는다. 혹은 그런 것들
만을 소설이라 여긴다.
90년대에 이르러 등장한 386세대의 신진들에게서 그러한 경향은 두드러
진다. 생리적으로 이성보다는 감성이 우월한 여성작가의 득세가 하나의 경
향을 형성하고, 상대적으로 소수인 남성작가들이 그러한 경향에 수긍한 까
닭일지도 모른다. 또 하나, 격변의 시대를 가장 극렬하게 겪으며 청춘을
쏟아 부어버린 그들에게 더 이상의 새로운 이야기는, 마치 전쟁터에서 돌
아온 병사가 뒷골목 건달들의 싸움을 보는 것처럼, 시시하였기 때문일지
도..
그 연유가 어찌되었던, 이청준과 이문열등의 중견세대가 일구어놓은 한
국문학의 서사미학은 '우리'보다는 '나만의' 내적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하
는 신진 작가들에게서 그 계보가 절단될 위기에 처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체에 비해서는 너무도 소소한 몇몇 작가(재미있게도 하나같이 남성작
가이다)만이 근근히 이야기로서의 소설의 맥을 이어갈 뿐, 어느새 신진의
경계를 지나 중견으로 발걸음하고 있는, 거의 모든 문학상을 섭렵하는 동
시에 출판계의 유행을 선도하는 다수의 작가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차라
리 '자아의 철학적 고찰'이라는 제목에 걸맞을 관념의 문장들만을 쓰고, 읽
으며, 인정하고 있다.
그들은 '이야기꾼'이기를 거부하는 대신, '철학자'이거나 '선지자'이기를
원할 뿐인 것 같다.
그리하여 소설의 독자들은 더 이상 소설을 읽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의
'철학적 고찰'은 소설이 아니기에 읽지 않는다.
세상이 문학을 버렸다고 외치면서, 그들은 그렇게 세상을 버린다.
천민 자본주의가 잉태한 대중소비문화의 거대한 우상의 그림자가 가두
어놓은 그 어두컴컴한 그늘속에서, 그들은 자신들만이 밝고 따뜻한 세계로
의 여행을 떠나려는 것인가?
2. 이야기뿐인 소설.
그러나, 동시에 소설은 단순한 '이야기'만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마치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형상과 관념의 결합이듯이, 사람의 이야기를
창조하는 소설역시 형상과 관념의 결합이어야 한다. 관념만으로 이루어진
글이 소설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만으로 이루어진 글 또한 소설은 아닌 것
이다.
단순한 이야기만으로 소설이 가능하다면, 애초부터 소설가(작가)가 소설
을 쓸 필요조차도 없다. 사람들이 매일처럼 겪고 스치며 바라보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형태의 이야기인 동시에, 소설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이야기속의 등장인물이 현실의 내 곁에서 술잔을 마주
치며 떠들고 부대끼는 사람들만큼 생생할 수 있을까? 그 어떤 고통스런
이야기가 내 손톱 끝에 박힌 가시만큼이나 나를 아프게 할 수 있을까?
소설의 창작이란 내 손톱 끝에 박힌 가시보다도 더 아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즉, 현실 이상의 현실을 들려주는 하나의
이야기 방식인 것이다.
그리하여, 관념만으로 치장된 소설들이 소설답지 않아진 것처럼, 이야기
만으로 끌고가는 소설 역시 소설이 되지 못한다.
자, 그럼 무협소설은 어느 쪽일까?
새마을 운동 이전의 참담하게 빈한하던 시절에 이미 번역, 편역의 형태
로 수입되었던 중국무협은 한 때, 일부 인텔리의 지적유희 수단으로서 유
력 일간지의 당당한 지면을 차지하며 연재될 정도로 식자를 위한 소설의
한 부류로 인식되었다. 아마 당시까지에도 채 벗어나지 못한 봉건시대의
사대주의가 그 저변에 깔려있었던 때문이기도 했겠지만(하기야, 작금에 이
르러도 사대주의의 치마폭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형편이기도 하다), 어쨌든
당시의 무협소설은 중국의 작가가 중국의 역사를 차용하여 쓴 일종의 역
사물로서 인정받았다.
한국인이 중국인의 이야기를 썼다는 이유로 '소설'이 아니라는 일부 근
엄한 평론가, 작가들의 평가는 거론하지 않겠다. 그것이 '한국소설'이 아닌
근거가 될지는 몰라도, 문학장르의 하나로서인 '소설'이냐 아니냐를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설이냐 아니냐의 구분은 누가 무엇을 썼느냐가 아
니라, 무엇을 어떻게 썼느냐인 것이다. 과거의 '베껴 쓴' 일부 무협들은 그
'어떻게'의 영역에서마저 죄를 범하였으므로 소설이 아니다, 라는 언도를
받아 마땅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다만 '한국소설'이 아닐 뿐, 소
설일 수는 있다.
비록 그것이 소설일지는 몰라도, 무협의 근간을 이루는 협객의 정서가
우리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읽을만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나는 유교의 정
서는 우리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으로 답을 하겠다.
각설하고, 과거에는 나름의 가치를 인정받고 존재하던 무협소설이었지
만, 현재에 이르러 그것은 차마 소설이라 칭하기에는 너무나 무참할 정도
로 절락하였다. 유신정권의 말도 안 되는 탄압때문이든, 처음부터 중국의
원형을 가감없이 차용하고 배껴버린 작가들의 행태때문이든, 평가따윈 아
무래도 좋으니 돈만 벌면 좋다는 출판사의 상업적 뻔뻔스러움때문이든, 결
과는 '무협은 소설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자, 여기에서 나는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한다.
무협소설이 외부로부터의 혹독한 시선을 감내할 수밖에 없어진 보다 근
본적인 이유는 어쩌면 외적환경에서보다, 소설 내적인 이유에서 찾아야 하
지 않을까?
나는 '이야기'에의 맹신때문이라는 이유를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위에 언급한 이유들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하였을테지만, 보다 근
본적으로,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가져온 암종은 '무협=이야기'라는 등식을
맹신한 독자와 작가 모두의 가치관인 것이다. 작가들은 '이야기' 이외의 요
소를 덧붙이려 하지 않고, 독자는 '이야기'이외의 요소를 읽고 싶어하지 않
는다. 그저 이야기만이 전부여야 진정한 무협이라고, 작가와 독자는 의견
의 일치를 보았던 것이다.
더구나 그 이야기란 것조차 얼마나 뻔하고, 얼마나 변태적인가?
이성도 감성도, 존재할 수 없다. 형이상학의 고상한 관념은 아예 생각치
도 않는다. 기껏해야 동물적 본성이거나 말초적인 자극, 다시 말해 고차원
적인 정신의 수고로움이 필요하지 않은, 파블로프의 침 흘리는 개의 그것
과 일맥상통하는 정서만을 지향할 뿐이다.
피와 죽음과 배신과 강간과 엽기야말로 이야기의 소재인 동시에 주제이
며, 이야기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힘의 근원이다.
작가도, 독자도 무협은 뻔하게 늘여놓은 뻔한 이야기를 뻔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아무 생각도 없이 시간을 써버릴' 수 있는 소비재라고 인식할
뿐이다.
그러나, 점점 바빠져가는 세계에서, 나이가 들수록 점점 바빠져가는 사
람들에게 '아무 생각도 없이 써버릴 시간' 은 점점 줄어든다. 제대로 된 세
계의 중심에서 제대로 된 성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큰 덕목은 최소
한의 시간에 (물직적이든 정신적이든) 최대한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치열
함이지, 그야말로 '시간 죽이기'에의 행위는 차라리 범죄에 다름아니어진
것이다. 한 때 느림의 미학을 옹호하는 경향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조차
도 정신적 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수단으로서 제기된 이론이었다.
이러한 세계에서,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시간을 죽이는 무협'따위나
읽는 사람들을 경멸하게 되고, 그 사람들이 읽는 무협따위도 경멸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계의 운동속도는 가속을 더하고, 시간에 쫓기는 연령도 더욱 어려지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그 무언가를 위해 쓰여진 시간을 대체할 수 있는 이익을
부여하지 못한다면, 무협은 머지않아 떡잎부터 게으른 초등학생이나 읽을
불량서적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이미 서른이 넘거나, 서른 이전이라도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
는 사람들중에서 무협을 읽으며 시간을 죽이는 이는 매우 드문 것이 현실
이다. 대개의 무협독자는 청소년이거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성인이고,
청소년이 성년이 되거나, 결국 사회에 적응하게 된 성인은 그 순간부터 무
협을 읽지 않는다. 그리고는 예전의 자신이 심취했던 무협을 경멸하고, 무
협독자를 경멸한다.
- 그거 읽으면 뭐가 남지? 남기는커녕 읽을수록 해가 될텐데..
이렇게 질문하면서 말이다.
..........
아직까지도 한 사람의 무협애독자인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
겠다.
3. 소설없는 곳에 방치된 독자에게로의 방향전환.
이른바 순수소설이 관념의 방향으로 떠나버렸다면, 무협소설은 이미 오
래전부터, 그리고 인터넷의 발전에 더욱 힘입어 이야기의 방향으로 너무
멀리 떠나버렸다. 비유하자면, 전자는 하늘로 솟았으며, 후자는 땅으로 꺼
졌다고나 할까?
백번 양보해도 남의 일기나 들춰보며 어쩌다 동병상련의 위안이나 만
족시켜 줄뿐인 무서사(無敍事)의 사변담론(私辯談論)은 덧없는 넋두리처
럼 지루하고, 변태적 낭만주의자의 환상에 빗대어 시간 죽이기를 유혹하
는 무협소설은 마약처럼 퇴폐적이다.
독자는 더 이상 읽을 소설이 없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한 사람의 무협애독자인 나는, 순수소설이 떠나고
비워버린 독자의 앞자리를 무협소설이 차지하였으면 하고 바란다. (순수가
아닌 장르로 규정지어진 소설이 어디 무협소설뿐일까마는, 나는 다만 무협
소설에 대해 말하기 위해 이 글을 썼을 뿐이니, 대안의 편협함을 용서하
기를).
4. 혈기린외전(血麒麟外傳)
만약 1994년 이전에라면, 당시에도 역시 열렬한 무협애호가인 나였음
에도, 차마 무협을 소설의 궤도에 올려놓고 독자의 면전에 펼쳐놓자, 라
는 식의 주장을 늘어놓지 못하였을 것이다. 오히려 다른 누군가가 그런
주장을 한다해도, 일고의 가치조차 없이 무시하는 데 동조하였음에 분명
하다.
소설을 한 채의 건축물로 비유하자면, 당시의 무협이란 마치 조립식
판넬로 하루만에 뚝딱 지어버린 가건물에 지나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1994년 이후로 무협은 마침내 소설의 본격적인 영역으로의 확
장을 시작했다.
한 사람의 무협작가, 좌백이 등장한 것이다.
그의 처녀작인 '대도오'는 그가 무협을 단순한 무협지가 아닌 '소설'로
인식하며 썼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무림에의 막연한 상상만으로 어슴프
레한 이야기만을 주절거린다던지, 어떻게 하면 과거의 중국무협과 닮을
수 있을까만이 유일한 고민이던, 그래서 몇 편을 쓰든, 누가 쓰든에 상관
없이 매번 천편일률적인 작품만을 만들어내던 일반의 무협작가와는 전혀
다른, 오직 그만의 생각이 담긴 그 만의 무협을, 그는 썼던 것이다.
그는 무협의 시선을 무림이라는 그 막연한 상상의 공간으로부터, 그
공간에서 숨쉬고 살아가는 인간으로 집중시킨 최초의 작가였다. 그리고,
무림의 인간을 빌어 현재의 인간을 표현하려고 노력한 최초의 작가이기
도 했다. 그에 의하여, 무협은 상상의 저편으로부터 현실의 안쪽으로 진
입할 수 있었다.
뒤이어 등장한 진산, 풍종호, 백야, 장경 등등의 작가들의 이른바 신무
협의 지평을 밟아갈 수 있는 최초의 토대를 작가 좌백은 그 홀로 일구어
냈고, 더불어 개척하였으며, 10년이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 여전히
그 길의 첨단에서 일군의 무협작가들을 이끌고 있다.
그 최근의 결과물이 좌백의 역작 '혈기린외전(血麒麟外傳)' 서문을 보
자.
"저는 매 작품을 쓸 때마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그 질문에
답하려 노력합니다. 이게 제 글쓰기의 방식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글쓰기
란 무엇인가를 찾으려 하고, 그렇게 찾은 것을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작
업 외의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가 무협을 소설의 반열로 이끌어 올려놓을 수 있었던 이유를
'혈기린외전'의 서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자신만의 글쓰기에 대한 정
의 내리기란, 그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정의 내리기에 다름아닌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그 자신의 정신적 본질이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담겨져
있다. 그가 어째서 한낱 흥미로운 이야기만에 집착하던 과거의 나태한
속물근성의 무협작가들과 달라질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해답을 나는 그 서
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혈기린외전(血麒麟外傳)'에서 좌백은 그의 글쓰기의 근간을 이루는 질
문을 '과연 무협이란 무엇일까?'에의 의문으로 돌렸다.
다분히 늦은 감은 있지만, 그는 이제 중견의 위치에 이른 지금에야 비
로소 자신이 쓰는 글의 장르적 정체성에 의문을 가졌음에 분명하다. 어
쩌면 최초의 작품을 구상하기 이전부터 의문을 가졌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이제야 그 의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구한 모양이다.
작가에서 글쓰기가 자신의 존재하는 형상이라면, 자신이 쓰는 글의 정
체성은 그 존재의 목적이다. 무협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담아가면서 써야할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무협작
가로서 살아가는 이에게는 자아찾기에 다름아닐 것이다. 스스로에게 부
끄러움이 없는 글쓰기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그는 무협의 초점을 무림이라는 무대에서 무림에 살고있는 사람으로
돌렸듯이, 이번에도 '무협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을 '협객이란 무엇인가?'
로 돌려놓고, 그에 대한 답을 구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3부작의 '혈기린외전(血麒麟外傳)'으로 작업의
결과물을 내놓았다.
무협에서는 보기 드문 7년간의 긴 시간과, 그 시간만큼의 노력이 깃든,
좌백 자신의 작품행로에서도, 한국무협의 역사에서도 '혈기린외전(血麒麟
外傳)'은 하나의 기념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혈기린외전(血麒麟外傳)'이라는 이름의 기념비는 앞으로 무협을 쓰고,
읽는 모든 이들에게 무협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규정하는 동
시에, 향후의 좌백이 써나가는 작품들의 방향을 지침할 것이다.
각각의 부마다 달려진 '협객불망원(俠客不忘怨)', '협객불실신(俠客不失
信)', '협객불기의(俠客不棄義)'의 부제는 좌백식의 협객에 대한 정의이며,
그는 각 부의 이야기로서 그 정의를 풀어내었다.
한 명의 평범하던 시골청년이 어떻게 협객이 되어가는가, 그가 협객임
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그리고 협객이 된 그 시골청년이 바라보
는 협객이란 무엇이며, 무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단계적 의문제시와 해
답의 과정을 통하여 작가는 우리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라고.
중국의 무협애호가들에게 김용 또는 고룡의 무협이 경전이라면, 이제
한국의 무협애호가인 우리들에게도 그네들의 그것에 전혀 뒤지지 않는
우리네만의 경전이 생겼다고 단언한다면, 너무 성급한 결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