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비평의 원문은 삼룡넷에 있으며 이번 <호협한랑기>의 비평은 삼룡 비평단에 작가분의 비평신청을 받아 작성함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한 비평단을 이끄는 단장으로서 이렇게 조잡한 비평글을 올릴 수 밖에 없음을 한탄하며 삼가 강자성님께 죄송하다는 말씀 거듭 드립니다. 그럼 <호협한랑기> 비평,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이번 비평은 편의상 존칭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 대해 양해 부탁드립니다^^;;)
* 덧. 본 평에 의한 책의 판매량 저하 등의 현상에 대하여 작성자의 책임이 없음을 명시합니다.
1. 들어가기에 앞서.
'의'와 '협' - '의(義)'는 옳을 의자로 옳은 일을 뜻하고 '협(俠)'은 그 옳은 일을 행함을 뜻한다. 그리고 '협객(俠客)'은 그 협을 행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호협한랑기>의 주제는 제목에서도 쉬이 유추할 수 있듯이 '의'와 '협'에 관한 것이다. 물론 고전적으로 정말 많은 무협소설에서 다뤄왔던 주제이며 무협독자라면 누구나 다 친숙한 주제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요즘에는 그런 주제를 지닌 무협소설들을 오히려 더 보기가 힘들어졌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곳에서 동분서주 강호의 '이상'을 위해 뛰어다니던 협객들은 근래 들어 무협계 일각에서 불고있는 '신무협'돌풍에 밀려난 지 이미 오래다. 그래서인지 <호협한랑기>를 보며 본인은 한때 즐거워했던 적이 있었다. 불어오는 '신무협'기류에도 휩쓸리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던 <호협한랑기>. 그렇지만 그 후로 세월은 많이 지났고 완결이 난 지금은 정말 많은 것이 변해 버렸다. 마지막 권인 5권 끝장을 덮으며 지금부터 그 아쉬움을 찬찬히 써 내보도록 하겠다.
2. 본
(1) 이상과 현실, 종이 한 장처럼 얇지만 너무도 넘기 어려운 벽.
'의'와 '협'은 무협세계에서의 영원한 이상(理想)이다. 이룰 수는 없지만 항상 동경하며 나아가고 자 하는 하나의 꿈. 적어도 '무림인'들로 이루어진 '강호'라면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협객은 바로 그 이상을 쫓는 사람들이다. <호협한랑기>의 주인공 풍힐 역시 마치 사막의 신기루 같은 '의'와 '협'이란 이상을 갈망하고 그리는 이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이상에는 이룰 수 없는 현실과의 괴리(乖離)에 대한 고통이 항상 존재한다. 가야할 길이 보임에도 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 괴로운 일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작중에서 풍힐은 근 십여년간 호랑이에게 키워진 후 화산파 장문인 임맹석에게 발견되어 강호의 전설적인 검객, 갈우에게 가르침을 받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 후 풍힐은 계속해서 하나의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고뇌한다. '인간'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어느 무협소설의 강호이건 하나의 불문율이 있다. 바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 말 그대로 약자는 잡아먹히고 강자는 살아남는 법칙이다. 그러기에 풍힐은 더더욱 고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강호의 '이상(의와 협)'과 '현실(약육강식)'은 전혀 정 반대의 성격을 지닌 것들이었으니! 그래서 작가는 풍힐이란 인물을 통해 그런 고뇌들을 토로하고 어긋나 버린 강호 현실에 관한 한줄기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보내려 하였다.
그렇지만 그뿐이다. 더 이상 어떤 진전도 <호협한랑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강호의 '이상'이란 것에 이야기한 무협작품은 이제 손으로 세기도 힘들만큼 무수히 많다. 그리고 풍힐과 같이 강호의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고뇌하는 주인공들도 많다못해 일상적인 강호 협객의 모습이 되어 버린 지 이미 오래다. 여기에서 <호협한랑기>의 가장 중요한 문제점이 드러나고 만다. 주제와 작가의 의도야 물론 좋지만 문제는 너무 식상한 것들이란 점이다. 지금 무협소설의 독자들은 연령층도 두텁고 그 역사도 오래되었다. 그러니 만큼 왠만한 소설장치로는 그들의 심경을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한다. 벌써 그들은 '강호'라는 세계에 대해서 여행할 만큼 여행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요즘 일명 '신무협'이란 것들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한창 주가를 올리는 게 아닌가?
그런 것들을 알고 있다면 무협소설을 씀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얼마나 새롭게 강호의 모습을 재조명할 수 있는가'란 점임은 쉬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알아야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호협한랑기>는 어떤가? 그런 새로운 시도 같은 것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아예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단지 여타소설들과 조금 틀린 점이 있다면 주인공 풍힐이 출생 후 십년간 호랑이에게 키워졌다는 점 하나뿐이다. 허나 조금 있다 거론하겠지만 이것은 <호협한랑기>를 참신하게 하는 데 하등 도움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짐만 되었을 뿐이다. 제목에서까지 '호협'을 넣을 정도로 중요한 설정이었음은 틀림없었을 텐데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우리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상을 이루기 위한 몸부림을 한다. 그 몸부림은 제각각 다른 색깔을 지닌 채 이 넓은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다. 소설이 현실세계를 기반에 둔 허구의 공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무협소설 역시 '의'와 '협'의 이상을 위한 날갯짓을 얼마든지 다르게 펼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말의 반복일지는 모르겠지만 <호협한랑기>에서의 그 날갯짓은 무기력하고 나약하다. 작중에는 그동안 수도 없이 봐왔던 전형적인 대사들이 난무하고, 풍힐의 인간적 고뇌도 지극히 일반적이다. 그리고 <호협한랑기>의 주제를 빛내고 뒷받침할 만한 조연들도 이야기 전개하는 데에만 급급할 뿐 그 이상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그들이 만들어 내는 사건들 또한 너무 평면적이다.
굳이 좌백님의 <생사박>, <대도오> 등을 꼽지 않더라도 현 무협계에 있어 진정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자신이 먼저 무협을 이해하고, 또 자신이 쓰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고, 또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이해하는 것이 순리요, 이치일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호협한랑기>의 작가 강자성님은 진지하게 자신에 대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신은 과연 정말 '의'와 '협'을 이해하고 있었는가? 혹은 어디선가 들은 말로 그럴듯하게 겉포장만 해놓은 것은 아니었던가? 글을 쓰는 당사자가 이해를 못했는데 그게 글 속에 제대로 묻어 나올 리가 만무하다. 그리고 그것을 독자들이 공감하는 것은 더더욱 기대조차 할 수 없다. <호협한랑기>는 딱 그 오류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물론 작가 분의 나이를 생각해본다면 벌써부터 그런 것들을 깨우치시기 에는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본인은 <호협한랑기>를 보면서도 내내 안타까워했다. 너무 출판에 급급한 나머지 작가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린 것은 아닐지.
(2) 한 마리 야수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
<호협한랑기>의 주인공 풍힐은 태어나서 근 십여년간을 호랑이에게 키워졌다. 그리고 화산파 인물들에게 구해져 그 후 야수 풍힐이 아닌, 인간 풍힐로 다시금 거듭난다. 여기서 잠깐 딴지일지는 모르겠지만 상식적으로 십년 가까이 야수로 커왔다면 도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보통 사람으로 되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이며 인간의 사회화 과정이란 게 작중에서처럼 대충 일이년 밥 안주고, 때리고, 타이른다고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허나 본인도 이것가지고 크게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이미 소설은 출판되어 완결까지 되었으며, 소설의 설정이란 것이 약간의 과장이 가미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풍힐이란 인간 아닌 인간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자. 제일 먼저 풍힐이 애초 호랑이에게 키워졌다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소설 제목에서도 '호'자가 들어가니 만큼 분명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니,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없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게도 작중 내에서 풍힐이 호랑이에게 키워졌어야 되는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그래도 굳이 한가지 꼽자면 풍힐의 유년시절을 가리기 위한 일종의 땜질 역할 하나밖에 나오지 않는다. 허나 이것으로 모든 게 설명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는 '호랑이에게 키워졌다'라는 문구가 주는 느낌이 너무 커다랗지 않은가?
그렇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다른 인물도 아닌 '주인공' 풍힐에게 이런 치명적 허점이 존재한다면 당연히 소설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실패'다.
원작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일권 초반부를 넘어가면서 풍힐이 예전 호랑이에게 길러졌다는 모티브는 어디에서도 쓰이지 않는다. 그냥 작중의 다른 인물들이 풍힐에 관해 얘기할 때만 '그의 과거는 이랬다'하고 이야기만 나올 뿐이다. 만약 일권 앞부분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풍힐이 호랑이에게 길러졌다는 사실 자체를 모를 정도다. 그럼 대체 작가님은 왜 풍힐을 호랑이에게 길러지게 하였을까? 왜? 단순히 소설광고문구를 멋있게 하기 위해서? 아니면 그러한 초반 부분을 통해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얄팍한 수단? 물론 내가 아는 강자성님을 미루어 볼 때 그런 의도는 결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더 안타깝다. 원래 작가의 의도야 어떻든 결과만을 놓고 봤을 때는 이런 말까지 나올 수 있으니. 작가가 애초에 이런 점들을 중요시하지 않고 소홀히 방치한 것은 분명 크나큰 실수다. 다음 부분에서 자세히 짚고 넘어가겠지만 소설에서 '플롯'의 부재란 자칫 이런 나쁜 결과까지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이제 원점으로 돌아가 풍힐이 야수가 아닌 사람이 된 후를 살펴보기로 하자. 작중에서 풍힐은 자신이 '사람'으로 거듭난 뒤에도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한다. 여기서 '사람'과 '인간'이란 언뜻 비슷하면서도 명확한 차이가 있다. 1920년대 유명한 현상학파 철학자였던 독일의 셸러는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에서 '정신으로서의 인간'과 '생명으로서의 인간(사람)'의 차이를 분명히 제시했다. 물론 본인도 빈약하고도 빈약한 단편적 지식만을 가지고 있을 뿐 그 차이를 제대로 알기에는 어림도 없다. 그래도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우리들 사람의 바램은 바로 우리들의 이상과도 같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한번 말해보고자 한다.
풍힐은 진정한 '인간'이 되고 싶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무협세계에서의 이상, 그러니까 '의'와 '협'을 통해 그 출구를 찾아내려 한다. 그러나 그는 소림사에서 실수로 언청학을 죽이면서 본의 아니게 한사람의 생명을 앗았다는 괴로움에 빠져들고 자기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거기에 더해서 '약육강식'이라는 강호의 현실이 자신의 이상과는 정 반대되는 이율배반적인 것임을 알고 더더욱 좌절하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작가의 의도가 비교적 생생하게 잘 전달되었다. 문제는 그 후부터다.
독자들에게 비춰진 풍힐은 현실의 무정함에 한없이 나약하고 고뇌하는 약한 존재다. 그러기에 독자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풍힐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함께 고민하고, 또 함께 괴로워하게 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다 같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도 작가는 여기에 너무 집착하고 말았다. 본인은 <호협한랑기> 연재시절에도 그런 사람들을 종종 봐왔다. 주인공이 너무 약하고 우유부단하다고 불평을 터뜨리는 사람들. 내 기억으로는 작가는 그때 겉으로 표현은 안 했어도 상당히 자극을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출판본 <호협한랑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대게 이런 스타일의 주인공들은 '먼치킨'적인 요소가 잘 들어맞지 않는 게 대부분이다. '먼치킨'적인 요소는 오히려 통쾌하게 악의 무리들을 응징하며 멋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들에게 어울린다. 헌데 풍힐은 어떤가? 소설 초반에는 툭하면 히죽거리며 돌아다니다 자신의 사매인 임소이에게 뒤통수나 얻어맞고 다니는 인물이다. 독자들에게 강한 카리스마나 힘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마음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 차분한 성격이나 리더십으로 가득 찬 인물도 아니다. 그보다는 보다 '인간적인' 면이 다분하고 실수도 종종 저지르는 친숙한 인물이다(어찌 보면 평범한). 이런 풍힐에게 무지막지한 '먼치킨'적인 요소가 잘 맞겠는가? 전혀 아니다. 옷가게에서 치수 안 맞는 옷을 사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 이런 면면들은 연재본 <호협한랑기>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현상이다. 되려 연재시절이 훨씬 신선하고 작가의 의도가 보다 성공적으로 풍힐에게 그려졌다.
너무나 우연적으로 장견을 만나 무림4천 중 하나인 백위흥에게 내공을 전수받고, 한창 소설흐름이 올라가던 4권쯤에 난데없이 법주대사에게 무리(武理)를 사사 받은 것 모두 풍힐을 '먼치킨'으로 만들기 위한 억지 설정이다. 게다가 풍힐이 사실은 전대의 마교절대지존에게 팔갑자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내공을 받고 태어났다는 설정이야! 한마디로 풍힐은 일관성 없는 작가의 설정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다 결국에는 그 날개가 꺾여 버린 불쌍한 인물이다.
(3) 방대한 강호세계, 그러나 결국은 용두사미로 끝나 버린 아쉬움.
<호협한랑기>의 강호설정은 굉장히 방대하다. 마교와 무림맹을 그 축으로 하여 녹림과 개방의 집합체인 방림회, 그리고 실전된 마교무공을 들고 나온 사도련까지. 나오는 인물들도 무수히 많고 그에 따라 작가가 독자들에게 보여 주어야할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다. 거기에다 무림맹은 무림맹대로, 마교는 마교대로 각각의 내부암투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독자들에게 충분히 보는 재미를 선사했다. 어디까지나 중반부분에 한해서다.
요즘 신무협들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방대해진 소설 스케일이다. 예전처럼 주인공 하나에 집중조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단체들을 번갈아 비추며 나름대로 독자들을 좀더 자신들의 세계 속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다. 물론 바람직한 시도고 좋은 현상이기는 하다. 허나 그에 따라 불거지고 있는 문제점이 바로 용두사미(龍頭蛇尾)격 결말이다. 판은 잔뜩 벌려놓고 나중에 가서는 오히려 작가가 그것을 감당 못해 허겁지겁 대충 끝을 내는 식이다.
소설은 처음과 끝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도 있다. 마무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독자들이 받는 인상은 그야말로 천지차이다. 마무리를 좋게 한다면 설령 처음과 중반을 잘 이끌지 못했다고 해도 다음 작품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그렇지만 끝이 별 볼일 없고 마무리를 허술하게 맺은 작가에게는 일말의 불신감을 가지게 된다. '유종의 미'를 거둔다는 자세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어찌 보면 <호협한랑기>의 구조적 흔들림은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일이다. <호협한랑기> 자체의 플롯이 빈약하니 연재본과 출판본에서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고 여러 곳에서 무리한 구성과 설정이 엿보이는 것이다. 작중 여러 집단들의 내부 암투가 평범하기 짝이 없고 눈에 빤히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를 들어 무림맹과 마교의 규모를 살펴보자. 작중에는 무림맹과 마교가 모두 수만을 상회하는 엄청난 세력을 지닌 것으로 표현된다. 본인이 알기로 우리 고대국가(고구려, 고려, 조선 등)에서는 일만만 되어도 '대군'이라 칭했다. 그리고 그 정도 숫자는 중국 국가들도 결코 무시하지 못했다. 헌데 한낱 강호인들이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과연 조정에서 가만히 있겠는가?
사실 풍힐이 전대마교교주의 아들이며 그에게 갓난아기시절, 팔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받았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픽션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무리 마교의 내공을 전수 받았기로서니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무공(작중 현마귀검)을 아무 비급이나 사부의 가르침 없이 순수 혼자서 깨우친다는 것은 조금 무협을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치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풍힐은 율파극을 격파하고 그냥 홀로 떠나 버린다. 무림맹과 마교 그 어느 쪽도 택하지 않은 채. 결국 풍힐은 자신의 이상을 이루기 위한 해답을 끝내는 찾지 못한 것이다. 아니, 이것은 작가 자신이 찾지 못한 것이다. 애초에 그 '이상'이란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깊게 성찰(省察)해 본 적이 없기에 소설 끝 부분에 가서 아무런 자신의 생각도 표현하지 못한 것이다. 풍힐만 날개가 꺾인 것이 아니라 작가도 같이 날개가 꺾여 버린 것이다. '현실'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4) 너무나 딱딱해져 버린, 그래서 더욱 아쉬운 '초심'.
본인은 <호협한랑기>를 보면서 내심 고민을 하였다. 작가분에게는 다소 잔인하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왜 이 작품은 재미가 없는가?'에 대해서다. 본인은 <호협한랑기>의 인터넷 연재시절부터 쭉 지켜봐 왔고 독자들의 <호협한랑기>에 대한 반응도 꼼꼼히 봐왔기에 <호협한랑기>가 적어도 인터넷 연재 시절에는 얼마나 큰 인기를 끌었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하게도 출판이 되고 부터 오히려 인기가 급 하락되어 버렸다. 왜일까? 그 이유는 <호협한랑기>의 장을 넘기면서, 권을 거듭할수록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바로 강자성님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의 '초심(初心)'을 잃어버린 것이다.
잠시 사설이지만 본인은 <호협한랑기>에 대한 일반적인 평을 알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하나 아무리 많은 사이트를 돌아다니고,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본인은 <호협한랑기>가 재미있다거나 서슴없이 남들에게 추천하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다. 간단하다. 자신 있게 추천할 정도로 <호협한랑기>가 끌리지 않는 탓이다. 물론 본인이 단정적으로 '재미없다'라고 평을 내린 것에 반발심을 가지시는 분도 많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다 같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본인도 그런 점은 잘 알고 있는 바, 최대한 객관적으로 <호협한랑기>를 분석해보았다. 예를 들면 얼마나 격투씬 등이 실감나고 박진감 넘치게 표현되었는가(액션성), 복선이나 반전은 탄탄한가(구성), 소설 속 캐릭터들은 생생하게 살아있는가(인물), 다른 작품과는 구별되는 뭔가 특별한 시도를 하였는가(독창성), 그밖에 감동적인 측면이나 러브스토리, 문체나 대화부분에까지 꼼꼼하게 체크하였다.
결론은 역시나 <호협한랑기>만의 '재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터넷 연재시절의 좋았던 느낌들은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리고 전혀 다른 글이 그 자리를 메꾸고 있었다. 아마 인터넷 연재시절부터 <호협한랑기>를 봐오신 분이라면 본인의 말뜻을 알 것이다. 인터넷 연재본과 출판본의 <호협한랑기>는 판이하게 다르다. 아니, 완전히 새로운 소설로 거듭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설 기본 스토리줄기부터 여러 가지 소설 내부설정까지 인터넷 연재본만 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바뀌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그럼 출판교정을 통해 <호협한랑기>가 더 나아졌는가? 본인은 이 물음에 부정적이다. 단 하나 문체나 문장력같은 것은 많이 매끄러워지고 성숙해졌다. 그러나 다른 부분, 그러니까 정작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에서 <호협한랑기>는 신인 특유의 풋풋함을 잃어버리고 마치 기성작가들의 것들을 무리하게 베껴 온 듯이 딱딱하고 어색해져 버렸다.
언젠가는 작가도 '초심'의 참 뜻을 깨달을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야말로 작가는 진정 자신만의 글을 자신 있게 독자들 앞에 써낼 수 있을 것이다.
3. 비평을 마치며...
<호협한랑기>는 여러 면에서 쓰라린 실패를 겪은 작품이다. 주인공 풍힐에서부터 진정한 '강호의 이상'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까지. 작가의 노력은 좋았지만 결국 그 결말은 흐지부지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게 강자성님의 끝은 아닐 것이다. 더 높은 도약을 위한 한번의 시련이라 여기고 앞으로도 계속 무협의 도에 정진해 주시길 기대하겠다. 언젠가 꺾여진 날개를 활짝 펴고 다시 하늘을 날아오를 그 때를 위해.
by Spirit of the Hwar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