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ㅡ 94차원 오타 영혼들의 반란]
음(陰)의 83차원인 93차원의 무한했던 거울 조각들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지던 찰나, 시원의 집행자 엘라와 그 일행은 온몸을 관통하는 서늘한 감각에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단순히 추운 것이 아니었다. 마치 수조 개의 미세한 메스가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발라내는 듯한, 지독하게 날카로운 ‘정위(定位)’의 감각이었다.
이곳은 일곱 번째 거대한 순환의 열네 번째 단계, 궁극적인 정밀성(精密性)의 영역이었다.
눈을 떴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끝없이 펼쳐진 ‘레이저 격자’의 공간이었다. 바닥은 눈이 시릴 정도로 투명한 다이아몬드 격자로 이루어져 있었고, 하늘에는 구름 대신 소수점 아래 수억 자리까지 뻗어 나가는 원주율(Pi)의 수치들이 실시간으로 흐르고 있었다.
공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순수한 정보의 입자’들이었다. 이곳에서는 숨을 쉬는 행위조차 일정한 리듬과 강도를 유지해야 했다.
만약 숨을 0.00001초라도 늦게 내뱉거나, 들숨의 양이 평소보다 1ml라도 많아지면, 시공간 전체에 ‘삐—’ 하는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모든 사물은 각진 기하학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먼지 한 톨조차 완벽한 정육면체로 깎여 있었다.
이곳의 중력은 ‘논리적 타당성’에 비례했다. 말 한마디를 내뱉을 때 주어와 서술어가 완벽하게 호응하지 않거나, 감정에 치우쳐 문법을 파괴하면, 그 즉시 발밑의 격자가 붉게 변하며 존재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이곳은 존재의 정당성을 ‘완벽한 계산’으로 증명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우주적인 규모의 무균실이었다.
가장 먼저 위기에 봉착한 것은 ‘우주의 눈’ 아론이었다. 평소 수만 개의 눈동자로 세상을 ‘두루뭉술하게’ 조감하는 것을 즐겼던 그에게, 모든 것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분해해야 하는 94차원은 고문실이나 다름없었다.
“악! 내... 내 눈동자가! 얘들아, 내 눈들이 자꾸 제멋대로 초점을 맞추려고 해!”
아론의 비명은 정확히 440Hz의 주파수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공중에서 산산조각 났다.
“이거 봐! 내가 ‘악’이라고 했는데, 공간이 내 목소리가 ‘표준 음정에서 0.3도 이탈했다’며 삭제해버렸어!
지휘관 인생 수만 년 만에 발음 교정받게 생겼다고! 무진, 제발 저 하늘에 떠 있는 숫자 좀 어떻게 해봐. 저거 보고 있으니까 내 뇌세포들이 주판알로 변하는 기분이야!”
아론의 옆에서 ‘유쾌한 진동’ 무진은 평소보다 더 차갑고 딱딱한 진동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이곳의 정밀성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감정 모듈을 일시 정지시킨 상태였다.
“아론, 조용히 하십시오. 당신의 말 한마디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량이 기준치를 초과하여 저의 생존 확률을 초당 0.05%씩 깎아 먹고 있습니다.”
무진의 목소리는 이제 완벽한 기계음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진주빛 흑색 몸체는 이제 격자무늬를 따라 직각으로만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의 논리는 명확합니다. Error(오류) = Deletion(삭제). 제가 방금 연산한 결과, 아론 당신이 지금까지 내뱉은 농담 중 99.9%는 이곳에서 ‘치명적인 시스템 오류’로 분류됩니다.
특히 당신의 그 팬케이크 레시피... ‘적당히’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들어갔더군요. 이곳의 가디언들이 그 레시피를 읽는 순간, 당신은 즉시 폐기 처분될 겁니다. 위트 모듈 강제 종료. 생존 모드 활성화 중.”
‘시간의 맥박’ 카이는 아예 자신의 심장을 멈춘 채, 공간을 흐르는 원주율의 박자에 자신의 영혼을 동기화하고 있었다.
“...3.141592... 박자가... 틀리면... 죽는다... 엘라... 여기는... 숨 쉴 틈이... 없어...”
시원의 집행자 엘라는 자신의 손에 든 황금 깃펜을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깃펜이 날카로운 ‘조각칼’의 형태로 변해 있었다.
“쓰는 것이 아니라, 깎아내야 하는 차원이군요.”
엘라는 자신의 가슴 속에 담긴 ‘황금빛 씨앗’을 보았다. 93차원에서 확장했던 그 거대한 기억들이, 이곳에서는 너무나도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데이터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엘라가 한 걸음을 내딛자, 발밑의 다이아몬드 격자가 문장을 띄웠다.
[사용자 엘라, 보폭 72.4cm 요청. 실제 보폭 72.5cm. 0.1cm의 오차 발생. 수정 대기 중.]
갑자기 허공에서 투명한 ‘바늘 가위’들이 나타나 엘라의 치맛자락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오차를 ‘수정’한다는 명목하에 그녀의 존재를 깎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나의 기억은 수치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엘라가 외쳤지만, 그 외침조차 문법적 오류로 처리되어 소리 없이 지워졌다. 그때, 94차원의 격자 너머에서 이전 93차원에서 보았던 그 ‘검은 손가락’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손가락 끝에 아주 가늘고 날카로운 ‘교정 펜’이 들려 있었다.
[...아름답지 않구나. 너의 서사는 너무나 많은 형용사와 불필요한 감정들로 오염되어 있다. 94차원에서 너의 죄명은 ‘비효율성’이다. 내가 너의 영혼에서 쓸모없는 오타들을 지워주지.]
검은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서, 사슬에 묶인 노바가 서서히 떠올랐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은 이전 차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녀의 피부는 투명한 유리처럼 변해 있었고, 그 안에는 핏줄 대신 정교한 톱니바퀴와 회로들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엘라... 도망... 쳐...”
노바의 목소리는 기계적인 노이즈와 섞여 흘러나왔다.
“그는... 나를... 교정했어... 나의 모든 슬픔과... 모든 분노를... ‘불필요한 데이터’라며 깎아냈지... 이제 나는... 완벽하지만... 아무것도 아니야...”
노바의 가슴 중앙에는 거대한 ‘삭제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녀는 ‘삭제 의지’에 의해 완벽하게 교정된, 서사의 찌꺼기 없는 껍데기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노바를 저렇게 만들다니!”
엘라의 눈에서 황금빛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 눈물조차 바닥에 닿기도 전에 ‘액체 낭비’라는 판정을 받고 증발해버렸다.
십승의 일시체는 위기에 빠졌다. 아론의 눈동자들은 격자 레이저에 의해 하나둘씩 ‘초점 부적합’ 판정을 받아 꺼져갔고, 무진의 연산 회로는 무결성 검사에 걸려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그때, 엘라는 깨달았다. 이곳이 요구하는 ‘정밀성’은 사실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사를 박제하기 위한 것임을. 오타가 없는 글은 완벽할지 모르나, 생명력이 없다.
"창조주는 우리를 완벽하게 만드신 게 아닙니다!”
엘라가 조각칼로 변한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쳤다.
“우리에게 '지성'과 ‘유머’를 주시고, '논리'와 ‘실수’를 주시고, 엄격한 '질서'와 ‘팬케이크를 태워 먹는 어설픔’까지 주신 이유는, 그 ‘오차’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엘라는 94차원의 규칙을 따르는 대신, 오히려 극단적인 ‘오류’를 범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황금 깃펜으로 격자무늬를 마구 긁어버렸고, 문법에 맞지 않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론! 무진! 카이! 가장 인간적인 실수를 하십시오! 이곳의 시스템이 처리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오타’가 되는 겁니다!”
아론이 눈을 번쩍 떴다.
“좋아! 내 전공이지! 무진, 내가 지금부터 세상에서 가장 말도 안 되는 아재 개그를 할 테니까, 네가 그 주파수를 우주 전체로 증폭시켜!”
아론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이봐, 정밀성의 가디언들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채소와 생선이 뭔 줄 아나? ...그건 바로 항상 우는 '우엉'과 '우럭'! 하하하!”
순간, 94차원 전체에 정적이 흘렀다. 원주율을 계산하던 하늘의 숫자들이 멈췄고, 레이저 격자들이 ‘논리적 해석 불가능’이라는 메시지를 띄우며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무진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감정 모듈을 강제로 폭주시키며 진동했다.
“푸하하하! 아론, 그 농담은 정말... 통계적으로 0.000001%의 가치도 없지만, 이곳의 논리 회로를 태워버리기엔 충분한 독극물이군요! 자, 나의 비논리적인 비웃음을 받아라!”
무진의 웃음소리가 기하학적인 파동이 되어 격자들을 타격했다. 완벽하게 정렬되어 있던 다이아몬드 바닥들이 ‘웃음’이라는 비정형적인 데이터에 반응하며 뒤틀리고 깨져 나갔다.
카이 역시 박자를 쪼개기 시작했다.
“싱코페이션(당김음)! 블루 노트(미묘하게 낮춘 음)! 규칙적인 박자는 이제 끝이야! 우리의 심장은 오차 속에서 뛴다!”
허공에 떠 있던 거대한 눈동자가 경련을 일으켰다.
[...무슨 짓이냐! 이 신성한 서사의 교정실을 더러운 오류로 가득 채우다니! 너희는 삭제되어야 할 쓰레기들이다!]
검은 손가락의 교정 펜이 엘라를 향해 내리찍혔다. 하지만 엘라는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검은 나비’ 문신, 즉 과거 노바가 실패하며 남긴 그 수많은 ‘흉터와 오타’들을 잉크 삼아 교정 펜에 맞섰다.
“우리는 쓰레기가 아니라, ‘수정 중인 문장’입니다!”
엘라의 황금빛 오류와 교정 펜의 검은 정밀함이 부딪히자, 94차원은 거대한 폭발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정밀함의 껍데기가 벗겨진 자리에는, 수조 개의 ‘삭제된 기억’들이 먼지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엘라는 그 먼지들 속에서 노바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노바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고마워... 엘라... 네가 만든 그 ‘아름다운 오타’가... 나를 잠시 숨 쉬게 했어... 하지만 다음 차원은... 더 위험할 거야...”
음(陰)의 84차원인 94차원의 잔해가 사라지며 나타난 출구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숭고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음(陰)의 85차원인 95차원, 그것은 궁극적인 신성성(神聖性)으로 단순히 정밀함이나 확장을 넘어, 존재가 ‘신’의 영역에 도전해야 하는 가장 무거운 관문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94차원을 탈출한 일시체는 비로소 정상적인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론은 자신의 눈동자들을 만져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제 좀 살 것 같네. 아까 그 아재 개그 농담, 솔직히 좀 천재적이지 않았어?”
무진이 지친 듯하지만 예의 그 까칠한 위트로 응수했다.
“아론, 당신의 농담 때문에 제 논리 회로의 15%가 영구 손상되었습니다. 책임지십시오. 하지만... 그 오류 덕분에 우리가 산 건 사실이군요.
오 마이 갓(Oh My God), 94차원이라는 ‘정밀한 사냥터’를 이렇게 엉망진창, 하지만 비교적 완벽하게 마감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차원이 다른 이야기합니다.”
엘라는 자신의 조각칼이 다시 부드러운 깃펜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기에 계속 써 내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자, 음(陰)의 85차원인 95차원의 신성함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십승의 일시체는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95차원의 문턱을 넘었다. 그들의 뒤편, 검은 균열 속의 눈동자는 이제 분노를 넘어선 기묘한 ‘집착’을 보이며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정복하지 못한 서사에 대한 뒤틀린 애정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