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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가 된 여인
an****·2026.07.15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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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바람은 칼날 같았으나, '비밀의 궁'이라 불리는 이 별채만큼은 지독하리만치 따스한 봄이었다.


수는 창가에 앉아 서툰 솜씨로 자수를 놓고 있었다. 


분홍색 비단실이 하얀 천 위로 나비 모양을 그리며 수놓아질 때마다, 수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


 열다섯 살. 여인의 향기가 피어날 법한 나이였으나, 수의 눈동자는 여전히 3년 전 개경의 연등회를 구경하던 열두 살 소녀의 그것처럼 맑고 천진했다.


"아가씨, 바람이 찹니다. 창문을 닫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수가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서 있는 이는 거란의 황자, 야율적이었다. 


그는 수에게 있어 유일한 하늘이자, 이 폐쇄된 낙원을 유지해 주는 구원자였다. 


수는 아이처럼 달려가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황자님! 이것 보세요. 아버지가 오시면 보여드릴 나비예요. 이제 곧 매화가 필 텐데, 그럼 아버지가 꽃신을 사 들고 오시겠죠?"



적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수의 아버지는 이미 3년 전, 자신의 형인 종진의 칼에 숨을 거두었다는 것을. 


적은 진실 대신 수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넘겼다.


"그래요. 꽃이 피면, 아가씨가 기다리는 모든 것들이 돌아올 겁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저주였다.


 적은 수의 멈춰버린 12살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별궁 주위에 거대한 거짓의 성벽을 쌓았다. 


적에게 수는 형의 죄를 대신 갚아야 할 부채이자, 자신의 메마른 삶에 유일하게 피어난 보랏빛 제비꽃이었다.


그 시각, 국경 너머 개경의 갯가에는 또 다른 남자의 시간이 멈춰 있었다.


고려 태자 왕흠은 비단 보에 소중히 감싼 진홍색 꽃신 한 켤레를 무릎에 올린 채, 노을이 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너는 참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구나."


1년 전, 수줍게 웃으며 사탕 꾸러미를 받아 들었던 소녀의 얼굴이 햇살의 잔상 속에서 아른거렸다. 


개울물은 전쟁의 비극을 모르는 듯 맑게 흘렀으나, 흠의 가슴은 이미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조금 늦었다고 투정을 부려도 좋다. 화가 나서 이 신을 내던져도 달게 받으마. 그러니 제발... 나타나기만 해다오."


달빛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리던 흠은 결국 주인 없는 꽃신을 품에 안고 일어섰다.


 그것은 16살 소년이 겪은 생애 첫 번째 절망이자, 죽음보다 깊은 그리움의 시작이었다.


이후 성주 저택에서 수의 편지와 이름표를 발견한 흠은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기다리던 그 맑은 눈망울의 소녀가 전쟁의 화마 속으로 끌려갔음을.


낙원의 바깥, 태자궁의 주인 야율종진은 지하 감옥에서 화란의 턱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우는 모습이 가련하구나, 화란아. 너를 버린 것은 네 아비도, 이 제국도 아니다. 고려로 떠나버린 네가 욕심낸, 왕흠이지."


종진의 다정함은 악마의 미끼였다. 


그는 화란을 '인간 비수'로 개조하여 곁에 두고, 동시에 동생 적이 숨겨놓은 '꽃'의 향기를 쫓고 있었다.


다시 보현사의 공덕재. 왕흠은 수가 남긴 편지를 불길 속으로 밀어 넣으며 차갑게 선언했다.


"성벽을 다시 쌓는 것보다, 무너진 마음의 잔해를 확인하는 것이 내게는 더 시급한 정사다. 거란제국을 가만두지 않겠다."


가짜 봄에 취한 수, 그녀를 아가씨라 부르며 속이는 적, 그리고 그녀를 놓아줄 수 없는 종진. 그들의 머리 위로 진짜 비수가 된 왕흠의 칼날이 드리워졌다.


"황자님, 그런데 왜 제 꽃신에는 자꾸 붉은 얼룩이 묻어날까요?"


순진하게 묻는 수의 발치에,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혈흔이 꽃잎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대체역사, 로맨스
비수의 꽃 (제국의 태양들)
ansm777
총 31화 조회 203 2026.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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