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의 마당에 문이 하나 서 있습니다. 게이트가 아닙니다. 균열은 상처처럼 벌어지지만, 이건 문틀이 있고 문짝이 있습니다. 누가 세워 놓은 것 같습니다.
앞의 아홉 화를 굴린 건 오해였습니다. 오우거는 야근 수당 때문에 파업 중이었고, 리자드맨이 백 년을 싸운 경전 구절은 수달 떼 때문에 끌이 한 획 미끄러진 자국이었습니다.
6화에서 흑룡이 지나가듯 흘린 말이 있습니다. 『문 여는 소리가 잠을 깨운다.』 10화에서 그 소리가 실물이 되어 나타납니다.
본편은 21화까지 나가 있습니다. 아래 발췌는 10화입니다.
━ 10화 발췌 ━
설악 1호 균열 너머, 검은 봉우리들 사이의 골짜기에 그것은 서 있었다.
멀리서 보면 그냥 검은 세로선이었다. 가까워질수록 그것은 문이 됐다. 폭은 성문만 하고, 높이는 그 두 배. 문틀은 검은 돌 같기도 하고 금속 같기도 한 재질이었는데, 빛이 닿는 각도가 바뀌어도 반사광이 없었다. 그림자는 있었다. 문제는 그 그림자가 지는 방향이었다. 해가 어느 쪽에 있든, 그림자는 언제나 보는 사람 쪽으로 누워 있었다.
골짜기 위 능선에는 나르가 엎드려 있었다. 젊은 용은 문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다가오는 우리를 향해 짧게 고개만 숙였다. 『어젯밤부터 어린 것들이 자꾸 구경을 오려 해서, 제가 능선을 막고 있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평소의 피로 대신 다른 감정이 실려 있었다. 용이 무서워하는 걸, 나는 처음 봤다.
평소 같으면 무엇 하나라도 돌판에 적고 있을 부관이, 지금은 눈 한 번 깜빡이는 것도 아까워하고 있었다. 문에서 눈을 떼는 순간 문이 한 걸음 다가올 것 같다는 얼굴이었다.
골짜기 초입에는 오우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방벽 수비대였다. 그리고 그 선두에, 낯익은 거구가 서 있었다.
『왔나, 통역자.』
가르둔이었다. 내게 바위 인장을 준 그 수비대장이, 완전 무장을 한 채 서 있었다. 처음 봤을 때의 그 갑옷에, 처음 보는 대검까지.
"수비대장님이 여긴 어떻게···"
『여기는 용족의 땅이지만, 저 골짜기 능선 너머가 우리 방벽이다. 남의 마당에 선 문은 남의 일이 아니다.』
카르낙스가 내려앉으며 말을 받았다. 산이 산 옆에 앉는 광경이었다.
『가르둔. 네 씨족이 빠른 것은 여전하구나.』
『흑암좌께서 몸소 나시는 것을, 문을 넘던 그 겨울 이후 처음 봤습니다. 그걸 봤으면, 얼마나 심각한 사태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두 존재가 나란히 문을 응시했다. 오우거 수비대장과 흑룡. 이십 년 전쟁의 세월 동안 인류가 각각 '재앙'과 '재해'로 분류해 온 두 존재가, 지금 같은 것을 경계하며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일당 구만 원짜리였던 인간이 하나.
이상한 기분이었다. 무서운데, 이 자리의 구성이 이상하게 든든했다. 그 든든함이 얼마나 갈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통역자.』 가르둔이 낮게 말했다. 『아까부터 저 안에서 소리가 난다. 우리 귀에는 바람 소리 같은 것이, 흑암좌의 귀에는 말 같은 것이 들린다.』
『말이다.』 카르낙스가 잘랐다. 『짐은 만 개의 언어를 스쳐 들으며 살았다. 저것은 말의 결을 하고 있다. 한데 짐이 모르는 결이다.』
용광로 두 개가 나를 향했다.
『들어 봐라. 네 귀는 모든 말을 듣는다 했다. 단— 열 걸음 밖에서다. 더는 다가서지 마라. 몸이 이상하거든 그 자리에서 물러나라.』
나는 문을 향해 걸었다.
* * *
열 걸음쯤 남았을 때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말 바람 소리 같았다. 문틈으로— 문은 분명 닫혀 있는데, 어딘가 틈이 있는 것처럼— 낮고 긴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스물아홉 해 평생 해 온 것 중에 제일 잘하는 일이었다. 듣는 것. 들으면, 언제나, 말이 됐다. 오우거의 포효도, 고블린의 문자도, 물건들의 수다도, 천 년 묵은 비석의 넋두리도. 내 세상에서 소리는 전부 말이 됐다. 그게 나였다.
그런데.
안 됐다.
소리는 분명 말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음절이 있고, 리듬이 있고, 문장이 끊어지는 자리가 있었다. 억양이 오르내렸다. 누군가— 여럿이— 저 너머에서 말하고 있었다. 대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이 안 잡혔다. 만국 언령이 그 소리를 붙잡으려 할 때마다, 뜻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물을 움켜쥐는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나빴다. 물은 차갑기라도 하지. 이건 잡으려는 순간 잡으려던 감각 자체가 지워졌다.
귀 뒤가 뜨거워졌다. 코끝에서 뭔가 흘렀다. 손등으로 닦으니 붉었다.
피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그 온기가, 방금 내 앞에서 벌어진 일이 진짜라는 유일한 증거 같았다. 나는 코피를 흘리면서도 저 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발췌 끝 ━
주인공은 스물아홉 해 동안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각성한 뒤로는 안 들리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 귀 하나로 오우거와 계약을 맺었고, 리자드맨 수백에게 절을 받았습니다. 그 귀가 방금, 처음으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분께 권합니다.
- 만능에 가까운 능력이 처음 막히는 장면을 좋아하시는 분. 주인공이 못 알아듣는 건 이 회차가 처음입니다.
- 웃기는 작품이 조용해지는 순간을 기다리시는 분. 위 발췌에서 농담은 자기 처지를 두고 하는 한 줄뿐입니다.
- 적대하던 종족들이 나란히 서는 그림을 좋아하시는 분. 인류가 재앙과 재해로 따로 분류해 온 둘이 지금 같은 것을 보고 있습니다.
40화를 전부 써 두고 시작한 연재입니다. 하루 두 편씩 올라가 8월 13일에 끝납니다.
『E급 통역사인데 자꾸 최강으로 오해받음』
읽어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선호작에 담아 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