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의 마당에 선 문 앞에서 코피를 흘리고 물러난 사흘 뒤, 주인공의 왼팔이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원인은 문이 아니었습니다. 지난달 갱도에서 고블린들의 밀린 몫을 중재해 준 일이었습니다. 이 세계에서 말로 세운 셈은 말이 기둥이고, 셈이 기울면 그 하중은 말을 한 사람의 몸으로 옵니다.
오늘까지 28화가 올라갔습니다. 아래는 11화입니다.
━ 11화 발췌 ━
사흘 뒤 아침, 왼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을 떴는데 왼팔이 안 올라갔다. 아픈 게 아니었다. 부러진 것도, 저린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무거웠다. 팔 위에 보이지 않는 누가 앉아 있는 것처럼. 들어 올리려고 하면 어깨 어디쯤에서 '안 된다'는 느낌부터 왔다.
이상한 건 그 자리였다. 왼쪽 어깨. 게이트에서 첫 계약을 하고 온 뒤부터, 그 말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묵직해지던 바로 그 자리. 그런데 지금 얹힌 건 그 무게가 아니었다. 그 옆에 새 손님이 하나 더 앉은 것처럼, 낯선 무게가 얹혀 있었다.
일단 살아는 봐야 했다. 아침이란 그런 거니까.
칫솔은 오른손으로 어떻게 됐다. 머리는 한 손으로 감았다. 반쯤 감았다는 뜻이다. 문제는 라면이었다.
라면 봉지가 두 손의 물건이라는 걸, 나는 스물아홉 해 만에 처음 알았다. 한 손으로 잡고 뜯으면 봉지가 통째로 딸려 온다. 발로 밟고 뜯자니 그건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결국 이로 뜯었다. 스프 가루 절반이 이불 위에 살포됐다.
『왼손은 어디 갔나.』 냄비가 물었다.
"파업 중이다."
『이불에서 매운 냄새가 난다.』 이불이 말했다.
『팔도 침수가 되는군.』 중고폰이 말했다. 『나는 그 심정을 안다.』
"침수 아니라니까."
세상만사를 침수로 해석하는 폰이었다. 냄비를 한 손으로 들고 물을 따르다 반을 흘리고, 면을 반으로 못 쪼개서 통째로 넣고, 젓가락질을 하다가 깨달았다. 젓가락은 오른손이 하는데 냄비는 누가 잡지. 냄비가 식탁 위를 슬슬 밀려 다녔다. 나는 결국 냄비를 무릎 사이에 끼우고 라면을 먹었다. 인류 유일 직군의 아침 식사였다.
(중략)
지명 수배가 아니라 지명 요청이었다. 균열을 넘어 갱도로 들어가자, 긱스가 담뱃대를 문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로는 인사도 받기 전에 내 왼쪽 어깨부터 봤다.
『왔구먼. 팔은 언제부터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기울어져 있구먼. 짐을 진 놈처럼.』 긱스가 담뱃대로 내 어깨를 가리켰다. 『청구서가 갔네.』
"청구서요?"
『지난달 네가 세운 셈이 이달에 무너졌네. 바그로가 다시 지급을 미뤘거든. 말로 세운 셈은 말이 기둥이지. 셈이 기울면, 기둥이 하중을 받는 법일세.』
잠깐만. 나는 머릿속으로 지난달을 되감았다. 나는 분명히—
"저 보증한다는 말은 한 적이 없는데요. 그냥 중재만 했는데요."
『중재가 곧 보증이지.』
긱스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얼굴로 말했다.
『두 말 사이에 서서 셈을 세운 자가, 그 셈을 받치지. 사이에 선 자가 지는 법일세. 몰랐나?』
"몰랐죠!"
『이제 알았구먼. 싸게 배웠네. 팔 하나 값이지.』
장로는 그게 진심으로 싼값이라는 투였다. 나는 항변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등골이 서늘해진 건 팔 때문이 아니었다.
내 왼쪽 어깨에는 이미 다른 무게가 얹혀 있다. 첫날의 그 말. 보증합니다. 아무도 안 덤빕니다. 약속할게요. 그건 중재도 아니었다. 대놓고 보증이었다. 오우거 셋의 등과, 헌터 아홉의 칼 사이에 세운 셈. 그 셈이 만에 하나 무너지는 날에는— 뭐가 회수될까. 팔 하나로 끝날까.
『얼굴이 하얗구먼.』 긱스가 말했다. 『이제야 말이 무서워졌네. 좋은 순서지. 무서운 줄 알고 쓰는 자가 오래 쓰는 법일세.』
━ 발췌 끝 ━
주인공은 그동안 게이트에서, 갱도에서, 강가에서, 어전에서 셈을 세우고 다녔습니다. 세울 때마다 뭔가가 등에 얹혔는데, 본인만 몰랐습니다. 이 회차에서 청구서가 처음 도착합니다.
이런 분께 권합니다.
- 능력에 값이 붙는 설정을 좋아하시는 분. 여기서는 인심 좋게 굴수록 몸이 축납니다. 위 발췌에서 청구된 건 왼팔 하나였고, 장로는 그걸 싼값이라고 합니다.
- 판타지 설정을 생활에서 먼저 겪는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 왼팔이 압류된 걸 알기도 전에 주인공이 먼저 붙은 상대는 라면 봉지입니다. 봉지는 두 손으로 뜯는 물건이었습니다.
- 조연이 주인공보다 세계의 규칙을 잘 아는 구도를 좋아하시는 분. 주인공은 보증한 적 없다고 항변하고, 장로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얼굴로 답합니다. 중재가 곧 보증이라고.
원고 40화를 전부 써 놓고 시작한 연재입니다. 지금까지 하루도 안 거르고 올라갔고, 8월 13일에 마지막 화가 나갑니다.
『E급 통역사인데 자꾸 최강으로 오해받음』
왼팔 압류가 남 일 같지 않으시면 선호작에 담아 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