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인은 분명 하늘에 의해 왕이 될 운명으로 태어났다.”
허나.
“왕위를 버린다고 한들, 그 누가 감히 이 내가 왕이 아니라고 입을 열 수 있겠느냐.”
천명(天命)이라는 이름의 역겨운 굴레.
신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거부하고 기꺼이 요괴의 살점을 씹어 삼켜 힘을 얻은 왕의 앞에 몰려온 척사들.
스스로 왕위를 내던진 그를 단죄하기 위해 하늘의 힘을 빌린 이들이 만들어낸 수십 장의 누런 부적, 벼락과 화마가 정전을 뒤덮던 찰나.
피로 물든 참상 한가운데 선 이융은 지루하다는 듯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정작 주인이라는 것들은 저 구름 위로 꽁꽁 숨고, 시답잖은 개새끼들만 풀어놓은 것이냐.”
그림자 속 시퍼렇게 벼려진 서늘한 검.
무심하고도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정전의 공간 자체가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뻗어 나간다.
투두둑-
천장을 물들이는 피분수와 함께, 두 동강이 난 시신이 핏물 고인 대리석 바닥 위로 무참히 떨어져 내린다.
그 단 한 번의 검격 속 살아남은 자들을 내려다보며, 피 묻은 옷매무새를 나른하게 매만지던 이융은 혀를 찼다.
“그리 맹렬히 바라본다고, 과인이 뼈다귀 하나라도 던져줄 것 같으냐?”
저 이역만리 떨어진 작은 고을의 아이마저 조선의 왕위를 선인들이 정해줌을 안다고 하나.
"과인은 언제까지나 오롯이 왕으로 존재할것이다.
그것은 3차례의 윤회를 지났음에도 동일하니.
네온사인이 꺼진 현대 도시의 폐허 속, 핏물이 튀는 전란.
서로를 저주하며 죽음만이 끝을 맺는 관계가 된 요괴와 척사들의 시대.
아아, 그래.
"자네의 말을 따르자면, 드디어 이 세상이 왕의 군림을 원하기 시작한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