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판타지 웹소설 속 귀족, 루시안 베르크에 빙의했다.
잘생겼다. 돈도 많다. 황제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
단점은 하나. 이놈이 원작 300화에서 정체를 드러내는 최종 흑막이라는 것이다.
용사의 든든한 후원자인 척하다가 동료들을 몰살시키고, 결국 각성한 용사에게 목이 잘리는 인간. 독자들이 “다시 보니 첫 등장부터 소름”이라며 극찬했던 그 반전의 주인공.
빙의한 김도현의 계획은 간단했다.
배신하지 않는다. 용사를 잘 먹이고 잘 키운다. 마왕이 죽으면 조용히 은퇴한다.
그래서 원작에서 자신이 용사를 죽이려고 준비했던 저주를 먼저 없앴다.
문제는 그 저주가, 훗날 용사를 딱 한 번 죽음에서 되돌리는 기적의 발동 조건이었다는 것.
그리고 죽을 리 없다고 믿었던 용사가, 이름조차 없는 아이 하나를 구하다 죽어버렸다.
“백작님이라면…… 나머지를 부탁할 수 있겠네요.”
아니요. 사람 잘못 보셨는데요.
용사의 장례식 날, 도현은 영웅을 잃은 왕국 앞에서 추도사를 읽는다. 누구보다 침통한 표정으로 관 위에 성검을 올려놓는 순간.
검이 그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계승 조건 충족.] [마지막 신뢰를 받은 자에게 사명을 이양합니다.]
왕국 최고의 성녀가 무릎을 꿇는다. 귀족들은 환호한다. 도현은 식은땀을 흘린다.
귀빈석에는 자신이 고용한 암살자들이 앉아 있다. 지하실에서는 마왕군 간부와의 회담이 진행 중이다. 그리고 오늘 밤은, 하필 자신이 이끄는 멸망 교단의 정기 총회다.
그날부터 낮에는 용사, 밤에는 흑막인 이중생활이 시작된다.
암살 조직에 민간인 보호를 명령하자 부하들은 “증인을 미리 확보하는 치밀함”에 감탄한다.
역병을 막으려고 독 제조 시설을 돌리자 “치료제를 독점해 왕국을 굴복시킬 계획”이라며 전율한다. 교단 해산을 선언하자 간부들은 정체를 숨길 때가 왔다며 더 깊이 잠복한다.
분명 착한 일을 하고 있는데 악역으로서의 명성만 높아진다.
설상가상으로 원작의 주인공이 사라지자 사건은 기억과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용사가 구했어야 할 도시, 용사에게 패배했어야 할 적, 용사를 만나야 했던 동료들까지 모두 도현 앞에 몰려든다.
그는 이들을 이용해 새 용사를 키우고 사명을 넘기려 한다. 하지만 자신이 떠넘긴 위험을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순간마다, 결국 직접 나서고 만다.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믿었던 그 바보 같은 용사가 자꾸 생각나서.
마침내 마왕은 새 용사의 정체가 오랜 동업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왕국에 그의 모든 악행을 폭로한다.
세상은 묻는다.
당신은 용사인가, 악당인가.
도현은 성검을 뽑고, 뒤에 선 암살자와 사교도와 마물들을 돌아본다.
“그건 끝나고 조사받겠습니다.”
[흑막과 용사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는 착각 코미디 판타지입니다.]
일단 세상부터 살려야 퇴직도 할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