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상을 돈 주고 사자고 말씀하셨죠? 제가 돈이 없어서 함부로 말씀드리긴 좀 그렇지만, 제가 쓴 나머지 소설들도 문학상을 사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고를 칠거면 제대로 쳐보자는 거죠. 문학상 한 개를 사면 편법이지만, 열 여섯개를 사면 예술입니다.”
임양욱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 이거다. 문학상 한 개를 사는 건 노이즈마케팅이지만, 열 여섯개를 사는 건 행위예술이었다. (중략) 임양욱은 전 재산을 들이부어 도합 5만권이나 뽑아낸 책들에 이런 문구를 붙였다.
16개 문학상 동시 수상작가, 문인.
이것이 그들의 전심전력이다. 임양욱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부었고, 소년은 자신의 모든 글들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그들은 세상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이제 세상이 대답할 차례였다.
혼란스럽다. 내가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찍는 카메라도 낯설었고, 지나치게 예쁘고 텐션이 높은 진행자도 부담스러웠다. 머리가 백짓장처럼 하얗게 물든 것 같다 (중략) “평소 보육원 생활은 어떤가요?” “보육원 생활이요? 썩 자유롭진 않아요. 물건같은 거 자주 빼앗아가고 그러죠. 특히 고등학생들 불시검사 보면 콘돔이란 콘돔은 쥐잡듯이 뺏어가면서 막상 임신해서 미혼모되면 갈보취급하는 게 좀 이상하긴 해요. 근데 어른들이 그렇다니까 그러려니 해야죠, 뭐.” 그 순간, 세상이 얼어붙었다.여기까지만 놓고 본다면 가볍고 흥미진진하게 읽을만한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는 그렇게까지 호들갑을 떨만큼 엄청난 걸작은 아니다. 전개가 치밀하고 읽는 재미가 있는 필력 좋은 소설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찾아보면 몇 편 씩은 발견되니까.
“사람들은 어린 천재에게 열광해. 자기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우리나라에 이런 천재가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은거야. 그 사람들은 네 책을 모르더라도 널 좋아할거다. 당연히 네 책을 아는 사람은 너를 더 좋아할거고. 간단하다니까? 웹소설 식으로 표현하자면 ‘어린애가 글을 잘 씀.’ 뭐 이런 거지.”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이 이것이었다. 이건… 너무 쉬웠다. 고작 시간을 돌아온 것만으로도, 간신히 메이저 문학상을 통과했던 유망주가 불세출의 천재가 되어버렸다. 작가로서의 성공이 고작 어린이 문학상 수상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라면,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과거의 나는 대체 뭐가 되는 것인가? (중략) 태어난 순간 운명, 혹은 수저라고도 불리는 사슬에 묶여, 인생이라는 거대한 강물에 던져진다. 그리고 평생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지쳐서 힘이 빠졌을 때 꼬르륵 가라앉아 죽어버린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대체 뭔가? 없었다. 내 유일한 발버둥인 꿈마저도 임파선암으로 허무하게 앗아가 버린 게 이 저주스러운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건 누군가의 악의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된 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이 비참한 삶을 조금 더 일찍 마무리하는 것. 그것이 나의 사인(死因)이다.
“빨갱이 사냥은 미움이 담긴 글입니다. 절 버린 부모님을 향한 욕설이나 다름없는 책이었지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사람이 사람을 사랑해야 마땅할진대, 이를 어긴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어둡고 끔찍해졌다. 그런 생각으로 쓴 소설이 맞습니다. (중략) …하지만 사랑은 어려운 일이더군요. 부모님이 절 버린 것처럼, 저도 누군가에게 그만큼 상처를 줬습니다. 그렇다고 사랑을 포기해야 할까요? (중략) 저는 이제 절 버린 부모님이 영원히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언제가 다시 각자의 사랑을 찾아 재혼하고, 새롭게 아이들을 가지고, 부디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그리고 만약 다시 실수하고 실패한다고 해도, 마음 속의 사랑을 잃지 않고 계속 사랑하며 나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 부모님과, 이 책을 읽은 독자 모두가 말입니다.” 문인이 언뜻 착잡한 듯, 후련해 보이는 표정으로 마이크를 내려놓았다.소설 속에서는 주인공이 쓴 책을 구구절절 묘사하지 않는다. 대략적인 줄거리, 그리고 필요에 따라 몇몇 부분이 발췌되어 나올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인섭이 쓴 책, ‘사인(死因)’과 ‘빨갱이 사냥’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이 책들이 불티나게 팔렸다는 소설 속 묘사 때문이 아니라, 작가가 평소에 갖고 있었던 고뇌와 주제의식- 흙수저 물고 태어난 대다수의 사람들이 거대한 운명의 압력에 어떻게 저항해 나가는가? 또는 이 시대의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가꾸어 나가야 하는가?-이 절절하게 녹아나오기 때문이다. 그것도 실체는 없이 제목과 내용 몇 줄 맛보기로 보여준 가상의 소설들을 통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