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 건물의 보편화(漢代이후).
중국 중부지방 上海 서쪽에 있는 安徽省 동남 가장자리의 徽州 근교에는 수많은 명대(1368-1644)의 훌륭한 주택이 남아 있다. 마을이나, 작은 거리에 면한 주택도 있고 마을 바깥 광활한 대지에 한 채만 서 있 는 것도 있다.
당시 사회의 통념으로 [대저택]이란 없었으며 대가족을 위해 세워진것도 없었다. 대부분 풍요하기는 하지만 부호가 아닌 상인의 것이었으며 그중에는 하급 관료 소유인 것도 있다. 이와 같은 주택은 단일 핵가족을 위해 설계된 것들이다. 즉 많은 상인들이 장사를 위해 본가를 떠나 양친과 함께 살 수 없으므로 이들 상인들이 아들 가족을 위해 따로 주택을 지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외 또다른 요소들이 중국의 보편적인 전통주택 평면을 구성하는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예를 들면 節儉令은 그 당시 주택의 규모와 장식을 제한한 것이다.
몇 가지 예외는 있었지만 정면 앞폭은 3間으로 제한하였으며 붉은 색은 창호와 문, 그리고 내부기둥에 이르기까지 사용이 금지되었다.
주) 明 洪武 26년(1693)의 定制에서는 廳堂(큰 홀)의 규모는 一品 및 二品은 5間 9架, 三品에서 五品은 5間 7架, 六品에서 九品까지는 3間 7架로 되어 있었으며, 서민의 盧舍는 3間 5架를 넘지 못하며 일체의 채색을 금지하였다.[間]은 정면 기둥 사이를 말하며, [架]는 단면 도리의 수를 말한다
이곳의 明代 주택은 좌향을 남향으로 계획하지 않고, 거의 남서향으로 하였으며 간혹 남동향인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이 지방의 지형적 특성에 의한 것인데 정남쪽에서 불어 오는 강풍을 피하고 고도의 겨울 햇살을 받기 위해 이러한 형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쪽으로 향해야 한다는 점과 공간의 기밀성은 굳게 지켜지고 있었다.
이러한 주택들은 2층 건물로써 정원이라기 보다는 光庭(採光用中庭)과 비슷한 좁은 中庭이 있고 바깥쪽으로는 거의 창문이 없고 장식도 없으며 평탄한 벽면으로 된 매우 검소한 소규모의 주택들이다.
바깥쪽에는 출입구문만 정성들여 만들었으며 내부로 들어와서는 난간, 창, 처마, 천정, 지붕, 部材에 풍부하게 장식을 하고 있다.
벽돌로 만든 외벽에 초벌을 하고 양회를 칠했는데 그 구조는 외벽에 완전히 독립된 기둥을 세운 보통 목조구조로 되어 있다. 그 중에는 본채 바깥쪽에 2층 높이로 독립된 벽체로서 처마 밑에 까치발 구조와 기와를 얹어 놓은 것도 있다.
또한 배흘림기둥(기둥의 가운데가 상부나 하부보다 굵은 수법, 중국에서는 [券-刀/己]刹이라 함. 보나 첨차와 같은 곳에도 사용됨)이 흔히 볼 수 있는 조각된 초석의 위에 놓여져 있다.
목조 계단도 역시 1층 바닥면과 같은 높이의 초석의 위에 놓여 있다.
윗층 바닥은 단면이 원형 또는 장방형인 장선 위에 판자를 붙인 것으로, 큰 보에 의해 지탱되어 있다. 그 중에는 색깔이 연하며 비교적 섬세한 도안을 그려넣은 판자붙인 달천정이나 보까지 동일한 단청으로 그려진 것도 있다.
보, 장선 및 바닥판은 1층 천정에 그대로 노출하고 천정의 지붕틀 구조 또한 그대로 노출시켜 대담한 조각을 한 것도 흔히 있는 일반적 일이다.
개방되어 있는 쪽의 판벽 즉, 간막이 벽으로 폐쇄되지 않은 부분의 판벽은 목조로 만들어져 있다. 1층에서는 중정을 향해 개방되며, 문짝이나 속이 빈 간막이, 장식이 없는 판자 또는 회칠한 벽판자 등으로 공간을 구획한다.
윗층의 벽면을 보면, 난간보다 윗부분은 창으로 연결된 개구부이고 아랫부분은 창밑벽이나 툇마루의 정면으로서 개방된다.
창밑의 징두리벽은 그 아래 있는 보 위에 놓여 있으며 양쪽 끝이 기둥에 고정되어 있는데 칠하지 않은 간단한 징두리판으로 된 것과 판에 장식을 한 것 2가지가 있다. 이것은 높이가 낮으면 그 방에서의 앉는 서열을 암시하기도 한다.
견실하게 조각된 판자를 이용하여 앞쪽으로 구부려 위로 휘어지게한 다음 폭이 넓은 창선반을 짜맞추고 다시 위쪽 난간으로 연장되게 하였으며, 뒤쪽 기둥과 연결되게 하였다.
창틀은 그 위에 놓아 창문을 그 선상에 달게 하였다. 즉, 기둥이나 또는 창선반과 방의 확장을 위해 돌출된 바닥면보다 바깥쪽에 있는 것이다.
기둥보다 앞쪽에 있는 창틀은 상부에서 기둥과 연결되게 하였고 바깥쪽은 3방향으로 돌출된 包(까치발 架構. 한국은 拱包, 工包, 貢包 枓 , 중국은 斗 , 일본은 組物)에 의해 처마를 기둥으로부터 약 4尺 가량 돌출시킨다.
그밖에 창은 창선반의 위치 즉, 바닥면으로부터 약 3尺 정도의 높이 에서 밖으로 개방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위쪽 반은 속이 빈 격자틀로 되어 있고 아래쪽 반은 널빤지로 되어 있는 창도 몇 군데 있다.
이들 주택에서는 난간, 널판, 그리고 윗층 방안의 조각을 새긴 지붕틀 부재에 단청을 하지 않고 다만 桐油(오동씨로 짠 기름)를 칠했기 때문에 그 나뭇결의 질감이 그대로 보여지고 있다.
명나라 장식장
일반적 용도
1층 거실, 응접실, 침실 2개
2층 가운데 방은 조상의 위패와 가보를 모셔둔 의례용 방, 침실 1
주 택
1) 자연 환경과 주택
황하유역에서 문명을 꽃피운 중국인들은 황토와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풀과 나무를 이용하여 원시적인 형태의 집을 짓고 살았다. 이후 문명이 발달하면서 건축 재료와 건축 기술이 진보되는 한편, 중국인의 의식과 사상 역시 중국인들의 의식과 사상 역시 중국인들의 건축에 많은 영향을 주어 중국의 독특한 주택을 발전시켜 왔다. 각 지역은 이러한 지형, 기후조건, 건축 재료에 알맞게 특색 있는 주택을 발전시켰다.
건축에 나타나는 중국인의 의식세계
중국의 심장부인 북경의 한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명청(明淸)시대 황제들의 궁전인 자금성이다. 이것을 보면 중화사상, 즉 중국은 한 가운데서 화려하게 빛나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것을 견주어 보면 유교에서 이상적인 세계로 생각하는 주대(周代)의 문물과 제도에 대해 서술한 고공기(考工記)는 건축에 대한 중국인들의 이상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천자의 도성은 중앙에 왕궁이 있고 왕궁의 동쪽은 종묘, 서쪽은 사직, 앞에는 정부 관서 뒤에는 시장을 배치하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도시 전체를 성으로 둘러싼 후 각 변에 3개씩 문을 설치하고, 성 안에는 동서방향과 남북방향으로 각각 9개씩 간선도로를 설치한 구조이다.
고공기에서는 물론이려니와 중국의 역대 도시는 모두 도시 전체를 성곽으로 둘러싸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는 폐쇄적이고 내향적인 중국인들의 의식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중국 전통가옥의 전형 사합원(四合院)
중국 전통 사극이나 영화를 보면, 젊은 남녀가 화초가 아름답게 핀 정원이나 주랑을 걸으면서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등장하곤 한다. 이런 집들은 보통 크고 작은 방들이 가운데 정원을 둘러싸고 있으며, 방과 정원사이에는 방들을 연결하는 중랑이 있어 전체적으로 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이것이 중국인들의 가장 전형적인 사합원의 모습이다. 이곳에는 집안의 주인이나 웃어른의 일상 거처와, 집안 사당, 집안 어른들이 모여서 회의하는 방들이 있다.
주건물의 양쪽에는 세로로 두 개의 건물이 마주보고 있는데, 이곳의 자녀나 아랫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주건물과 마주보는 쪽에 건물이 배치되지 않은 구조도 있는데 이를 삼합원이라 하기도 한다.
황토고원 지대의 동굴 주택 요동
산서, 섬서, 감숙, 하남 등 황토고원 지대 주민들은 그 지역의 지질, 기후, 지형 등의 조건에 알맞은 요동이라 불리는 독특한 동굴집을 짓고 살았다. 시베리아로부터 세찬 바람에 실려온 누런 흙들이 쌓여서 이루어진 황토고원은 두께가 200m에 달하는 곳도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황토의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황토를 파서 집을 지었다. 그 방법에는 대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천연 토벽에 가로로 동굴을 판 것인데, 보통 여러 개의 동굴을 서로 연결하거나 상하의 여러 층을 연결하였다.
객가(客家)의 방어용 주택 토루(土樓)
복건 서남지역과 광동 동북지역에 가면, 높은 토담에 높고 낮은 푸른 기와 지붕이 겹겹이 겹쳐 있는 거대한 건축군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주택은 아열대지구의 울창한 삼림과 어울어져 있어, 그 안에 들어가면 마치 한 폭의 산수화 속에 들어간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어떤 지역에서는 거대한 원형탑과 같은 고층의 성채건물도 볼 수 있다. 이런 특이한 건물들이 이 지역 객가들이 모여사는 토루라는 건축이다.
토루는 삼당옥, 방루, 원루 등 세가지 형태로 나누어지는데, 어떤 형태이든 적어도 삼층 이상인 것이 일반적이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형태가 방루식 토루인데, 복건성 용암현의 적중진에는 지금 262채의 방루 건물이 남아있다. 방루식 토루는 정사각형 형태의 높은 담을 한바퀴 두르고 담을 따라 여러개의 방을 5,6층 높이로 설치하였다. 나무로 계단을 만들고, 집 한 가운데는 빈터로 남겨두거나 정원이나 대청 등 거주자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을 배치하기도 하였다. 규모가 큰 곳은 방이 4백여간이나 되는 곳도 있었으며, 각각의 방들에는 개별 세대들이 거주하였다.
현대 중국의 주택 문제
1998년 7월 1일을 기점으로 중국에서는 주택의 무료 분배 정책이 완전 폐지 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자본주의 경제방식을 도입하면서도,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인민들에게 주거지를 분배해 주는 것을 원칙으로 했던 중국 행정 당국이 이런 조치를 내렸다는 사실은 실로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이 주택 분배정책을 폐지하게 된 까닭은 오늘날 도시의 주택문제가 날로 심각해져, 더 이상 이 제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혁.개방과 함께 도시의 주택문제는 정부가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의 하나가 되었다.우선 집세를 현실화하고 그렇게 해서 축적한 돈으로 새로운 주택 건설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하나의 방안으로 체택되었다. 또 현대적인 도시의 건설 과정에서 기존의 전통적 도시경관이 많이 훼손되었다. 과거 도시를 둘러싸고 있던 성곽이 허물어지고 전통주택과 주택지역이 파괴되었으며, 거기에 대규모 아파트나 도로가 들어섰다. 이런 규모들은 문화와 사상을 담은 전통적인 건축과 달리, 최소한의 생활공간으로서의 의미만 지니게 되어 미적 감각은 완전히 도외시 하였다.
1950년대 북경에 건설된 공공주택은 마치 군대 막사와 같은 모습이었으며, 58 ‘대약진운동’ 시기에는 주택은 오로지 잠만 자는 공간으로 취급되어 부엌과 화장실도 만들지 않았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건축과 도시 건설에서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키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