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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운의 <비정강호>
운류혼·2003.12.0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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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상운의 소설을 읽을 때 마다 내 정체성에 의심을 품곤 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라고 보고, 또 선하게 봐야한다고 주장하는 임준욱을 읽을 때마다 울리는 나와, 임준욱과는 정반대에 서있는 한상운을 아는 이들에게 침을 튀며 추천하는 나 사이에서 오는 헛갈림이었다.

그래도 그 정도의 의문은 하찮다. 인간이 입체적인 존재인 것이야 누구나 아는 사실일 테니까.

하지만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나를 겁먹게 했다. 그 의문은 나의 성취향에 관한 의문이었다.

한상운은 대상을 조롱한다. 아니 조롱 정도가 아니라 가학적으로 학대한다.

그 대상의 범위에는 독자들도 들어있는 것 같다. 바로 나도 포함된다는 말이다.

문제는 (나를 향한)그 조롱과 가학이 나에게 어떤 감흥을 준다는 데 있다. 혹시 내 속에 내가 모르는 내가 숨어있는 게 아닐까.

나는 야동을 볼 때도 SM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데 말이다.

그런데 <비정강호>는 달랐다. <비정강호>는 충분히 재미있고 괜찮은 무협소설이다. 그러나 내 기대는 비껴간 무협이다.

한상운은 변절했다.

그 변절의 흔적은 책표지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여태까지 한상운의 소설 표지에는 블랙코미디 혹은 코미디라는 단어가 붙어있었다. 그런데 <비정강호>는 다르다. 하드보일드란다.

<비정강호> 이전에도 한상운의 소설은 충분히 하드보일드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굳이 표지에 올렸다는 것은 특유의 비꼼이 빠졌다는 말이다. 즉 말빨이 많이 죽었다는 말과 같다고 생각된다. 소설을 읽어보니 역시 그랬다.

사실이 무시된 배경에 결론 없는 결말. 감정적 배설과는 거리가 먼 내용. 아니 그 어떤 약점도 다 묻어 버리게 했던 게 그의 말빨이었다. 순간순간 보이는 그의 재기에 나는 반했었다.

그런데 <비정강호>는 일체감을 유지하면서 앞문장의 꼬리를 물고 뒷문장이 이어지던 깨끗한 문체는 어디가고 중언부언에 군더더기의 무게가 만만찮다. 내 기대에 비해 너무 평이하다.

특히 1권 초반은 한상운이 쓴 글 같지가 않다.

창작 외적 요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슬쩍 외면하면 소설의 길이가 쓸데없이 길다는 생각도 든다. 한권이나 반권 정도 잘랐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표지를 넘기니 또 변절의 흔적이 또 보인다.

머리말이 없다.

나는 한상운의 소설을 읽을 때 마다 속았었다. <비정강호>를 읽기 전에는 이번만은 속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또 속았다. 이번에는 너무 예상이 들어맞아서 속았다.

지금까지 한상운의 소설은 머리말에서부터 독자를 조롱하고 있다.

머리말의 언급을 믿고 나는 끝까지 “뭔가 있을 거야”라고 믿다가 뒤통수를 맞곤 했다.

머리말에 <혈기린외전> 운운한 <신체강탈자>만큼 <혈기린외전>과 거리가 먼 무협이 또 어디 있고, ‘추리소설’에 대한 애정을 표시한 <무림맹 연쇄살인사건>보다 추리가 필요 없는 무협이 또 어디 있겠는가. <도살객잔> 역시 <영웅문>을 내비치며 도망갈 구멍까지 만들어 놓은 영악한 머리말이 있다. 그런데 <비정강호>에는 머리말이 없다.

나는 한상운의 소설이 노리는 첫 번째 타깃이 무협이라고 생각했다.

독자들은 실제로는 ‘만화량’같이 살면서, 무협에서만 의와 협을 찾으며 자신은 의협을 추구하는 인간이라는 착각으로 자위하고,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절대자를 통해 소아병적 배설의 쾌감을 요구하고, 작가는 거기에만 맞춰 “무협소설은 이래야 해”라고 말하며 단선도로와 같은 무협만을 만들어 내는 상황을 향한 야유를 보낸다고 생각했다.

그 야유와 조롱의 시작이 머리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닌가? 모르겠다.

아무튼 <비정강호>는 충실히 규칙을 준수한다. (스포일러가 되기 싫지만)막바지까지 범인은 감춰져 있고, 한번의 반전이 있고, 독자의 몫을 많이 남겨두긴 했지만 <독비객> 이후 가장 결말다운 결말이 있다.

그런데 나는 그 결말다운 결말이 아쉽다. 규칙을 준수하는 한상운이 아쉽다.

규칙을 준수하는 만큼 애정을 품었던 튀는 그의 재기와 뻔뻔함이 사라졌다.

물론 독특한 성취향의 인신매매범이었던 배상훈을 무림사에 빛나는 고수로 등장시키고,(배상훈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나 보다.) 만화량과 장경을 당당히 끌어오는 뻔뻔함과 군데군데 재기 넘치는 문장이 보이긴 해도 그 걸로는 많이 모자라다.

생각해 보니 변절은 제목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비정강호>라는 제목은 틀렸다.

<비정강호>에는 한상운의 그 어떤 소설보다도 정이 많다.

읽은 사람들이 오해할까봐 변명을 잔뜩 해놨지만 동료애, 동지애도 등장하고 연민과 동경도 등장한다.

결국 모든 애정은 자기애의 발현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무엇보다 <비정강호>에는 가족이 등장한다. ‘염천서’에게도, ‘반고’에게도 ‘만화량’에게도 가족이 없다. 돌아갈 곳이 없는 자들이다.

가족이 있다는 것은 돌아갈 곳이 있다는 뜻이다. 흔히 그런 걸 안정이라고 말하지 않나?

돌아갈 곳이 있는 자는 비록 그곳이 푸근한 곳이 아닐지라도 돌아갈 곳이 없는 자보다는 덜 불안하다.

하지만 가족은 나로 인해 시작되지 않은 짐이 될 수도 있다. 가족 구성원으로써 책임과 의무가 따르기 때문이다.

‘만화량’은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한 사람이다. 자기 혼자 무엇이든 해왔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홍장환’은 다르다. 술로 잊어도 순간이고 가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이 죽을지 몰라도 가족이 잘못되는 꼴을 보기 어렵다. 누구를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다. 가족이 잘못되는 꼴을 보고 있기에는 참을 수 없이 불편하기 때문에 목숨이라도 걸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가족의 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상운의 가족은 감상적인 임준욱의 가족에 비해 현실적이다. 애증이 겹쳐진 관계. 발을 들이밀기도 싫을 때도 있지만 결코 도망칠 수 없는 관계. 한상운이 책임을 지기 시작했다.

이전 소설에서 한상운의 야유와 조롱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야유와 조롱의 끝에는 늘 허무와 비관 밖에는 남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집안일인데도 옆집 총각이 쑥덕거리는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 자조였다.

그런데 <비정강호>에서는 내키지 않은 티가 역력하지만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지 않는다.

한상운은 늙었다. 한상운 자신도 그걸 느낀 건지 노회한 티를 낸다.

그래서 슬펐다. 영악은 얄미울 뿐이지만 노회는 사람을 슬프게 한다.

후기를 보면 <비정강호>는 죽작가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에 하나였다고 말한다. 벗어날 수 있을까?

어느 곳에선가 한상운이 ‘새롭게 무림인이 된 한상운’이라고 말하는 글을 봤다.

<비정강호>가 잘돼서 새롭게 돌아온 무림에 머물러 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한상운의 소설에는 늘 인간에 대한 경계도, 여성에 대한 불신이 있다. 또 다분히 영상적이고 연극적이다. <비정강호>에서 느와르의 그림자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비정강호>는 한상운의 소설이 맞다. 그래도 내 머리에 남아있는 한상운은 아니다.

벌써 한상운의 다음 글이 기다려진다. 최소한 그때까지는 내가 생각하는 한상운의 베스트는 <도살객잔>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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