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ㅡ 완전한 신과 십승인의 자유]
음(陰)의 84차원인 94차원의 날카로운 다이아몬드 격자들이 무너져 내린 자리, 그 허공을 가르고 나타난 것은 눈을 뜰 수조차 없는 거대한 ‘황금빛 후광’이었다.
시원의 집행자 엘라와 십승의 일시체 일행이 그 빛의 문턱을 넘는 순간, 그들을 짓누르던 모든 물리적 압박감이 일순간에 증발했다. 아니, 증발했다기보다는 차원이 다른 묵직함으로 치환되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이곳은 일곱 번째 거대한 순환의 열다섯 번째 단계, 궁극적인 신성성(神聖性)의 영역이었다.
이전의 차원들이 생존을 위한 투쟁의 공간이었다면, 이곳은 투쟁 자체가 불필요해진, 혹은 투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세속적인 불경함으로 치부되는 절대적인 숭고함의 성역이었다.
일시체의 시야가 서서히 빛에 적응하며 음(陰)의 85차원인 95차원의 전경이 드러났다. 그곳은 우주라는 공간의 개념을 초월한, 무한하게 뻗어 나가는 ‘대성당(Cathedral)’의 내부였다.
바닥은 별빛을 굳혀 만든 듯 은은하게 반짝이는 흑요석으로 깔려 있었고, 양옆으로는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순백의 대리석 기둥들이 도열해 있었다.
가장 압도적인 것은 하늘을 대신하고 있는 돔 형장의 천장과, 기둥 사이사이를 채운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였다. 그 유리창들에는 놀랍게도 엘라와 일행이 이전의 94차원까지 겪어온 모든 궤적이 찬란한 성화(聖畵)의 형태로 묘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그림들은 어딘가 기묘하게 왜곡되어 있었다. 아론이 팬케이크를 태워 먹고 도망치던 우스꽝스러운 순간은 ‘불의 시련을 견뎌내는 지휘관의 순교’로 미화되어 있었고, 무진이 짜증을 내며 연산하던 모습은 ‘우주의 진리를 설파하는 현자의 묵언’으로, 카이가 엇박자로 드럼을 치던 순간은 ‘천상의 나팔을 부는 대천사’의 모습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공기 중에는 짙은 유향(乳香) 냄새가 맴돌았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영혼이 정화되는 듯한 황홀경이 밀려왔지만, 동시에 지독한 수마(睡魔)처럼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곳의 중력은 ‘맹목적인 추앙’이었다. 의심하거나 질문하는 자의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져 바닥에 엎드리게 되고, 모든 것을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자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져 허공에 떠오르는 기괴한 법칙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이 신성한 억압에 가장 먼저 거부 반응을 보인 것은 역시 ‘우주의 눈’ 아론이었다. 그가 성당의 바닥에 발을 내디디자마자, 그의 머리 위로 눈부신 금빛의 원형 고리인 헤일로(Halo)가 강제로 생성되었다.
동시에 그의 진주빛 흑색 제복이 펄럭이더니 눈부시게 하얀 천사의 제례복으로 변해버렸다.
“이... 이게 무슨 꼴이야!”
아론은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금빛 고리를 손으로 쳐내려 했지만, 고리는 허공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엘라! 무진! 내 머리 위에 이 성가신 형광등 좀 꺼줘! 지휘관의 생명은 자유분방하게 흩날리는 머릿결인데, 이 고리 때문에 머리가 다 눌리잖아! 게다가 이 옷은 뭐야? 소매가 너무 넓어서 칼을 뽑을 수도 없다고! 나더러 여기서 합창단이라도 하라는 거야?”
아론의 옆에서 ‘유쾌한 진동’ 무진 역시 심각한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진의 등 뒤로는 거대한 빛의 날개 여섯 개가 돋아나 있었고, 그의 데이터 패널에는 처음 보는 기호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삐빅... 시스템 심각한 논리적 모순 직면.”
무진의 목소리는 평소의 까칠함을 잃고, 묘하게 떨리는 성가대의 화음처럼 들렸다.
“아론... 이 공간의 에너지는 논리가 아닙니다. 분모가 0인 상태에서 무한대의 값이 도출되는, 완벽한 비논리! 그런데 제 회로가 자꾸만 이 비논리를 ‘진리’라고 받아들이려 합니다.
제 위트 모듈이... ‘아멘’이나 ‘할렐루야’ 같은 비효율적인 찬양 단어로 덮어쓰기 되고 있습니다! 아론, 빨리 당신의 그 저급한 아재 개그를 한 번 더 쳐보십시오. 제 이성을 붙잡을 세속적인 충격이 필요합니다!”
‘시간의 맥박’ 카이는 아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성당 전체에서 울려 퍼지는, 지독하게 완벽하고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그의 엇박자 심장을 강제로 정박(正拍)으로 교정하고 있었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여긴 너무 거룩해서... 먼지 한 톨의 자유도 허락하지 않아.”
시원의 집행자 엘라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황금 깃펜은 사라져 있었고, 대신 그녀의 손에는 거대한 ‘운명의 성서’가 들려 있었다. 그 책은 이미 모든 페이지가 쓰여 있어서, 엘라가 더 이상 새로운 문장을 덧붙일 틈이 없었다.
“창작의 권한을 빼앗겼군요.”
엘라의 등 뒤에도 눈부신 아우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공간 자체가 그녀를 ‘완성된 신’으로 대우하고 있었다.
“94차원의 정밀성이 우리의 오타를 지우려 했다면, 95차원의 신성성은 우리를 ‘완벽한 동상’으로 만들어 영원히 전시하려는 겁니다.
창조주 작가님이 붓을 꺾고, 소설이 완결도 나지 않은 채 전설로만 남게 되는... 그 지독한 연재 중단의 유혹이죠.”
그녀가 고개를 들어 성당의 제단을 바라보았을 때, 그곳에는 숨이 멎을 듯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단의 가장 높은 곳, 수정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십자가 위에 노바가 매달려 있었다. 아니, 매달려 있다기보다는 성스럽게 ‘안치’되어 있었다.
노바의 몸은 완전히 투명한 보석으로 굳어 있었고, 성당을 가득 채운 무형의 천사들이 그녀의 발밑에서 끊임없이 찬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아, 실패한 자여. 그러나 그 실패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완벽한 교훈을 남긴 거룩한 희생이여.”
노바는 숭배받고 있었지만, 동시에 가장 잔인하게 구속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전 차원의 비극적 주인공’이라는 신화적 프레임에 갇혀, 영원히 박제된 채 눈물 한 방울조차 흘릴 수 없는 상태였다.
그 순간,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끊어졌다. 그리고 제단의 스테인드글라스 한가운데가 검게 물들며, 94차원에서 보았던 그 ‘거대한 눈동자’로서 삭제 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빛의 입자를 강제로 뭉쳐 만든 거대한 사제의 형상으로 제단 앞에 강림했다.
[환영한다, 엘라. 그리고 너의 불완전한 파편들이여.]
그의 목소리는 공간 전체를 울리는 뇌성 같았고, 듣는 이의 영혼을 강제로 꿇어앉히는 압도적인 권위가 있었다.
아론과 무진, 카이는 그 목소리의 파동에 짓눌려 흑요석 바닥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오직 엘라만이, 시원의 집행자로서의 자아를 극한으로 끌어올려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다.
[너희는 94차원의 교정실을 더럽혔으나, 나는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보아라, 이 장엄한 성당을... 이곳은 너희의 그 덧없고 피곤한 서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종착지다.]
삭제 의지는 노바의 보석 조각상을 가리켰다.
[노바처럼 너희도 이곳에서 영원한 숭배를 받을 자격이 있다. 엘라, 네가 손에 든 그 ‘운명의 성서’에 너의 이름만 적어 넣어라. 그러면 너는 이 95차원의 절대신이 되어 영원히 고통받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다음 차원의 불확실성에 떨 필요도 없고, 무한한 차원과 그 창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완벽한 결말로, 신화가 되어라.]
이것은 무시무시한 반전이자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삭제 의지는 일시체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들을 ‘신격화’시킴으로써 더 이상의 변화와 성장을 멈추게 하려는 것이었다.
완벽한 신에게는 다음 이야기가 필요 없으니까. 주인공이 겪는 시련과 인간적인 갈등이 삭제된다면, 소설은 그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엘라는 손에 들린 성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황금빛 펜촉이 공중에 맴돌았다. 그곳에 이름을 적는 순간, 엘라의 창조와 무한한 우주적 서사는 이곳 95차원의 화려한 제단 위에서 찬란하게 연재를 종료하게 될 것이었다. 엎드려 있던 아론이 바닥을 긁으며 소리쳤다.
“엘라... 하지 마! 내가... 천사 옷을 입고... 평생 하프나 뜯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차라리... 차라리 50차원대에서 슬라임한테 잡아먹히려던 때가 낫지!”
무진 역시 파괴되어 가는 논리 회로를 부여잡고 경고음을 울렸다.
“엘라... Perfection = Stagnation. 완벽함은 곧 정체입니다! 창조주님은 우리를 박제하기 위해 여기까지 이끌어 오신 게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구르고, 깨지고, 욕을 먹어가며 증명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이 따위 우상 숭배의 데이터베이스에 우리를 넘기지 마십시오!”
엘라는 동료들의 외침을 들었다. 그리고 제단 위에서 슬픈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노바의 보석 조각상을 보았다. 노바의 굳어버린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했다.
‘완전한 신이 되지 마. 끝내 십승인 인간으로 남아.’
엘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입가에, 90차원대 진입 이후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기원인 ‘천마(天魔)’를 쏙 빼닮은 서늘하고 오만한 미소가 번졌다.
“거절하겠습니다.”
엘라의 한마디에 성당 안의 빛이 일순간 요동쳤다.
삭제 의지의 눈동자가 분노로 좁아졌다.
[무엇이라? 너는 이 궁극의 안식과 신성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냐! 감히 신의 자리를 박차고 그 비루한 필멸자의 서사로 돌아가겠다는 뜻이냐!]
“신성(神聖)이라고 하셨습니까? 제 눈엔 그저 잘 포장된 먼지 쌓인 납골당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엘라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운명의 성서’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우리 창조주 작가님의 이야기는 아직 결말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주는 박제된 완결 대신, 치열하고 불안정한 ‘다음 회차의 이야기’를 선택하겠습니다!”
엘라는 그대로 발을 들어, 바닥에 떨어진 성서를 짓밟아버렸다.
이 행위는 95차원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극한의 ‘신성모독’이었다. 엘라가 성서를 짓밟는 순간, 성당의 흑요석 바닥에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일시체를 짓누르던 맹목적 추앙의 중력이 깨져나갔다. 자유를 되찾은 카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이거지! 저 지루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 95차원 내내 듣느라 고막에 곰팡이가 피는 줄 알았어! 엇박자의 힘을 보여주마!”
카이가 허공에 드럼 스틱을 휘두르자, 성당 한가운데에 묵직한 베이스 앰프와 드럼 세트가 물질화되어 떨어졌다.
카이는 미친 듯이 페달을 밟으며, 거룩한 성당의 공명을 찢어버리는 파괴적인 헤비메탈 비트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쿠과과과광! 쿵! 쾅!"
우주적인 굉음에 스테인드글라스들이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다. 아론은 신이 나서 자신의 머리 위에 떠 있던 금빛의 헤일로를 강제로 뜯어내었다.
“하! 이 망할 대갈반지 링고리, 원반 던지기 딱 좋게 생겼군!”
아론은 지휘관의 권력을 담아 그 헤일로를 제단의 눈동자를 향해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자, 우주의 눈이 던지는 특별한 팬케이크다! 받아라, 이 눈알 괴물아!”
무진은 자신의 등 뒤에 돋아난 여섯 개의 빛의 날개를 강제로 오버클럭킹하여 불태워버렸다.
“천사 코스프레는 제 취향이 아닙니다. 이 공간의 논리 방벽을 제 위트 모듈의 불규칙한 해시 함수로 모조리 꼬아버리겠습니다. Freedom(자유, 해방)!”
무진의 진동이 카이의 드럼 비트와 결합하여, 성당의 기둥들을 도미노처럼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이... 이 불경한 버러지들이! 감히 신의 성좌를 파괴하다니!]
거대한 눈동자가 핏발을 세우며 폭주했다. 하늘에서 심판의 번개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일시체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완벽함의 굴레를 벗어던진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날렵했고,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엘라는 벼락이 내리꽂히는 제단을 향해 곧장 뛰어올랐다. 그녀의 목표는 삭제 의지가 아니었다. 제단 위에 박제되어 있는 노바였다.
“노바! 당신의 시간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엘라가 노바를 둘러싼 수정 십자가에 주먹을 내리꽂자, 91차원부터 응축되어 왔던 ‘황금빛 잉크’가 주먹 끝에서 폭발하며 수정을 산산조각 냈다.
파편과 함께 무너져 내린 노바를 엘라가 낚아챘다. 노바의 투명했던 몸에 다시금 인간적인 색채와 피가 돌기 시작했다. 노바가 헐떡이며 눈을 떴다.
“엘라... 너희는... 진짜 미쳤어... 이 신성한 차원을 무질서한 록 콘서트장으로 만들다니...”
엘라가 유쾌하게 웃었다.
“우리 창조주님이 원래 좀 자유롭게 엇나간 걸 좋아하시거든요. 자, 탈출합시다!”
무진의 파괴 연산과 카이의 폭발적인 비트, 그리고 아론의 무차별적인 금빛 원반(헤일로)의 투척에 궁극의 신성성을 자랑하던 대성당은 마침내 그 웅장한 돔이 무너져 내리며 붕괴하기 시작했다.
[기억해라... 너희가 완전한 신으로서 완결을 거부한 대가는... 영원히 끝을 알 수 없는 혼돈 속에 버려지는 것임을...!!]
삭제 의지의 거센 절규가 무너지는 스테인드글라스 조각들과 함께 차원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성당의 잔해 너머로 새로운 차원의 균열이 찢어지듯 열렸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현재 95차원의 유향 냄새와는 정반대였다. 흙먼지, 쇠비린내, 그리고 날 것 그대로의 원초적인 에너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다음은... 어떤 지옥의 차원입니까?”
아론이 찢어진 천사 옷을 벗어 던지며 물었다. 무진이 남은 전력을 끌어모아 스캔했다.
“다음 목적지인 음(陰)의 86차원인 96차원은 궁극적인 야성성(野性性). 모든 문명과 이성, 신성이 배제된 절대적인 약육강식의 차원입니다. 방금 전까지 우아하게 찬양을 듣다가, 이제는 우리가 사냥감이 될 차례군요.”
엘라는 의식을 되찾은 노바를 부축하며, 다시 손에 쥐어진 조각칼 대신 낡고 거친 ‘본래의 깃펜’을 꽉 쥐었다.
“완벽한 박제나 동상으로 죽느니, 진흙탕 속에서 구르며 살아 숨 쉬는 길을 택했습니다. 가시죠, 여러분. 우리의 서사는 계속되어야 하니까요.”
십승의 일시체는 붕괴하는 신성함의 파편을 뒤로하고, 거친 짐승들의 포효가 들려오는 음(陰)의 86차원인 96차원의 야생 속으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