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한복판에 균열이 벌어져 뿔 달린 짐승 수백이 쏟아졌습니다. 물건의 말을 듣는 주인공이 현장에서 확인한 건, 그것들이 쳐들어온 게 아니라 뭔가에 쫓겨 도망쳐 나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보고서는 반나절 만에 승격돼 정부서울청사로 올라갔고, 이튿날 아침 화상 정상회의가 잡혔습니다. 일당 구만 원이던 사람의 좌석표에 '통역 한도윤'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현재 공개된 분량은 38화입니다. 아래는 13화 회의 장면입니다.
━ 13화 발췌 ━
회의의 첫 안건은 몬스터 측 공식 입장이었다. 나는 사흘 동안 게이트 네 개를 돌며 받아 온 성명서를 꺼냈다. 종족 연명의, 인류사 최초의 공동 성명이었다. 받아 오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오우거 측 초안은 세 줄이었고(『우리가 안 그랬다고. 우리도 당했거든. 끝.』), 용족 측 초안은 마흔 조항이었고(붙임 별첨 셋), 고블린 측은 성명서에 임금 조항을 끼워 넣으려 했고, 리자드맨 측은 전문을 경전 인용으로 시작하자고 했다. 나흘 밤을 갈아서 그걸 한 문단으로 만든 게 나다. 통역사가 아니라 편집자였다.
편집 회의만 네 번이었다. 나는 종족 다섯의 자존심을 한 문단에 욱여넣으며, 국밥집에서 배운 걸 써먹었다. 다들 급할수록 짧은 메뉴가 잘 팔린다.
"낭독하겠습니다. 접경 종족 연명 성명. 하나, 을지로의 폭주는 우리가 보낸 것이 아니다. 짐승들은 접경의 초식 무리이며, 무언가에 쫓겨 문을 넘었다. 둘, 우리 쪽에서도 문은 멋대로 열리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열지 않았고, 열 수도 없다. 셋, 우리는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한 번 세상을 잃은 자들이다."
상황실이 조용해졌다. 화면 속 얼굴들이 각자의 언어로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통역 부스들이 바빠졌고, 질문이 쏟아졌다. 나는 두 시간 동안 인류와 몬스터 사이가 아니라, 인류와 인류 사이에 절여졌다. 질문의 절반은 성명서를 못 믿겠다는 내용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성명서를 전해 온 나를 못 믿겠다는 내용이었다.
질문은 구체적이다 못해 창의적이었다. 어느 나라는 오우거의 '끝.'이 협박이냐고 물었고(아니라고 답했다), 어느 나라는 리자드맨이 경전을 인용한 저의를 물었고(인용이 아니라 인사말이라고 답했다), 어느 나라는 성명서 원본의 재질이 정말 돌이냐고 물었다. 사실이라고 답하자 그 나라 대표가 보좌진과 오래 상의했다. 돌에 새긴 국제 문서를 어느 캐비닛에 넣을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그때마다 옆에서 한 감별관이 마이크를 당겼다. "참입니다." 국가 원수들을 상대로 두 음절. 어느 나라 정상이 통역을 거쳐 물었다. 그 판정 능력은 검증된 것이냐. 한 감별관은 눈을 반쯤 감은 채 답했다.
"방금 그 질문, 진심으로 하신 거 맞네요. 참입니다."
화면 속 얼굴이 묘해졌다. 저쪽 나라의 거짓말이 앞으로 몇 개나 이 방에서 판정될지 계산하는 얼굴이었다.
(중략)
사고는 회의 세 시간째에 터졌다.
강경한 발언을 이어가던 한 정상이 화면 너머로 나를 정면으로 지목했다.
"통역사 당신은 그들을 직접 봤소. 그렇다면 당신이 말해 보시오. 몬스터들이 다시는 인간의 도시를 침범하지 않는다고— 당신이 보증할 수 있소?"
상황실의 모든 눈이 나를 향했다. 화면 속 수십 개의 눈도. 스물아홉 해를 한국에서 산 몸은 이런 순간에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상대는 어른이고, 자리는 공식적이고, 정답은 '네'로 정해져 있다. 머리보다 입이 빨랐다.
"보—"
그리고 나는 느꼈다.
공기가 미리 눌리는 걸. 아직 뱉지도 않은 말이 벌써 어깨 위 허공에서 조립되는 걸. 게이트 첫날에는 몰랐던 감각이다. 수업료를 주 삼 회씩 낸 지금은 안다. 저 말이 완성되는 순간 그 무게가 전부 내게 실린다. 종족 전체의, 앞으로의 모든 행동을 내 등 하나에 얹고서.
어길 주체는 내가 아니어도 된다. 저쪽 세계의 누가 어디서 담을 하나만 넘어도, 청구서는 나한테 온다. 그때 회수되는 게 왼팔 하나로 끝날 리가 없다. 팔 하나가 갱도 셈 하나 값이었다. 이건 종족 전부의 셈이다.
"—증."
나는 그 두 글자 사이에서 혀를 세웠다. 상황실 기준으로는 통역사가 말을 더듬은 걸로 보였을 거다. 내 기준으로는 절벽에서 뒤꿈치로 선 거였다.
"···이라는 단어는, 취소하겠습니다."
"뭐라고?"
"제 직업에서 보증은 계약입니다. 비유가 아니라 물리적인 계약입니다. 제가 어기면— 아니, 누가 어겨도, 제 몸으로 갚는 계약입니다. 저는 방금 여러분 앞에서 한 종족 전체의 미래를 제 등에 얹을 뻔했습니다. 그 말은 제가 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지구의 누구도 쓸 수 없는 말입니다."
침묵. 그리고 한 감별관의 목소리.
"참입니다."
이번 두 음절에, 방 안 공기가 달라졌다. 화면 속 얼굴들이 일제히 자기 보좌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통역사의 말이 물리 법칙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각국의 참모들이 실시간으로 계산에 들어가는 게 보였다. 어느 칸에서 누가 물었다. 그럼 당신이 '평화가 온다'고 선언해 주면, 그게 실현되는 거요?
"아니요. 그냥 제가 다칩니다."
회의는 그렇게, 인류가 언령이라는 걸 처음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 날로 기록됐다.
━ 발췌 끝 ━
이 작품의 규칙은 하나입니다. 말에는 무게가 실린다. 주인공이 두 말 사이에 서서 셈을 세우면 그 셈이 그의 몸에 얹히고, 셈이 무너지면 몸에서 회수됩니다. 앞선 회차에서 회수된 건 왼팔 하나였습니다. 정상회의에서 그가 그 단어를 취소한 건 겸손이 아니라 계산이었습니다.
이런 분께 권합니다.
- 작은 사람이 큰 자리에 앉는 낙차를 좋아하시는 분. 헌터 시험에 칠 년 낙방하고 짐을 지던 사람이, 화면 속 나라들 앞에 통역으로 앉아 있습니다.
- 초반에 깐 설정이 뒤에서 그대로 회수되는 걸 좋아하시는 분. 주인공이 정상회의에서 혀를 세운 근거는 이미 팔 하나로 치러 본 값입니다.
- 말이 통해도 여전히 안 통하는 회의를 좋아하시는 분. 성명서를 읽은 뒤 쏟아진 질문의 절반은 성명서를 못 믿겠다는 내용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걸 전해 온 사람을 못 믿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40화 완결 원고를 다 써 놓고 매일 올린 연재입니다. 8월 13일이 마지막 화입니다.
『E급 통역사인데 자꾸 최강으로 오해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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