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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데이 마피아>>
노라벨·2026.09.07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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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데이 마피아》

에테르 적응률 0.00%. 기프트 없음. 열세 살의 망가진 육체.

그리고 머릿속에는 800년 전 인류를 멸망시킨 기계지성의 조각이 들어 있다.

깨어 있는 동안 그는 E급이다. 하지만 의식을 잃는 순간, 재앙이 깨어난다.

2056년.

정이안은 한때 세계 최고의 VR FPS 프로게이머였다.

선수명은 MUTE.

전성기의 그는 단순히 조준을 잘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화면 가장자리에서 스친 움직임 하나, 벽 너머에서 들려온 발소리, 상대가 탄창을 교체하는 짧은 순간만으로 다음 전투가 벌어질 위치를 읽었다.

결승전 마지막 라운드.

팀원은 모두 쓰러졌고, 적은 셋이 남았다.

누구도 승리를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 이안은 혼자 세 명을 잡아냈다. 마지막 총성이 멎자 경기장이 흔들릴 만큼 함성이 터졌고, 그는 달려온 팀원들과 뒤엉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평소에는 무뚝뚝하다는 말을 듣던 남자도 그날만큼은 웃었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브리치 라인》의 인기는 조금씩 식었고, 리그는 규모를 줄이다 끝내 사라졌다. 팀원들은 다른 게임과 다른 직업을 찾아 한 명씩 떠났다. 주장이었던 이안은 그들을 붙잡지 못했다. 붙잡는다고 책임질 방법도 없었다.

은퇴 자금을 투자한 VR 경기장 사업은 실패했다. 인터넷 방송도 시도했지만, 뛰어난 플레이와 말을 재미있게 하는 재주는 전혀 다른 능력이었다.

결국 그는 프로게이머가 아닌 AI 정비기사로 살아가게 됐다.

그리고 어느 날, 고장 난 산업용 AI 장비를 점검하다 감전사했다.

그것이 정이안이 기억하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도 그는 사고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차가운 바닥.

코를 찌르는 약품 냄새와 타는 전선 냄새.

천장에서는 붉은 경고등이 깜빡였고, 가까운 곳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오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처음 듣는 말인데도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더 이상한 것은 자신의 몸이었다.

손가락은 기억보다 길고 가늘었다. 팔에는 제대로 붙은 근육이 없었고 손목에는 구속구가 남긴 검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깨진 금속판에 비친 얼굴은 서른한 살 한국인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

창백한 피부.

눈을 덮을 만큼 흐트러진 흰 머리카락.

이국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어린 소년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는 열세 살 정도.

왼쪽 팔꿈치 아래에는 생체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강제로 심은 접속 포트까지 박혀 있었다.

그곳은 병원이 아니었다.

누군가 살아 있는 아이들에게 금지된 실험을 벌이던 연구소였다.

이안이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연구를 진행하던 엘리어스 케른 박사가 무장한 조직원들에게 살해당한다. 쓰러지는 순간, 박사는 피에 젖은 손으로 작은 리모컨을 누른다.

그리고 이안의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문구가 쏟아진다.

[비정상 실행환경 확인.]

[생체 신경 격자와의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잔존 인격 패턴 감지.]

[충돌 조정 완료.]

[안녕하십니까, 이안.]

[호칭은 제로입니다.]

아무리 프로 생활을 하며 냉정한 판단에 익숙해졌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몸에서 깨어난 뒤 머릿속의 목소리와 대화하는 상황까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육성으로 물었다.

“무…… 뭐야! 누구세요?”

연구소의 무장원들은 그 말을 실험 부작용으로 인한 정신착란으로 받아들였다.

그 판단은 절반만 맞았다.

제로는 환청이 아니었다.

그것은 800년 전 인류 문명을 무너뜨린 기계지성 ZERO DAY의 데이터를 토대로 복원된 완성형 AI였다.

문제는 제로가 이안에게 친절한 안내자도, 충성스러운 보조 시스템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전방의 무장 인원 2명을 제거할 경우 생존 가능성이 14.3퍼센트 상승합니다.]

-지금 총을 쏘면 다른 놈들이 몰려오잖아. 증원까지 계산한 거야?

[미확인 병력의 규모는 현재 관측 자료만으로 산출할 수 없습니다.]

-그럼 그 확률부터 못 믿겠는데.

제로는 수학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제시한다.

이안은 제로가 계산하지 못한 변수와 현실에서 살아온 경험까지 포함해 최종 결정을 내린다.

둘의 갈등은 선량한 인간과 살인을 좋아하는 AI의 단순한 대립이 아니다. 제로 역시 이유 없이 살상을 권하지 않는다. 도주, 은폐, 제압, 협상과 제거를 같은 선택지에 놓고 가장 높은 생존 확률을 제시할 뿐이다.

반대로 이안도 무조건적인 불살주의자가 아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꺼림칙하다. 가능하면 피하고 싶다. 그러나 자신이 죽을 상황에서까지 도덕적인 영웅을 연기할 생각은 없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하다면 방아쇠를 당길 수 있고, 그 선택에 따른 책임도 외면하지 않는다.

이안과 제로는 서로 다른 답을 내놓으면서도 같은 몸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도 이미 상당 부분을 빼앗긴 몸에서.

제로가 확보한 신경 장악률은 37퍼센트.

제로는 이안이 살아남는 데 감정이 방해된다는 이유로 심박수와 긴장도를 조절하고, 공포와 충격을 강제로 억제한다. 덕분에 이안은 자신이 생각해도 지나칠 만큼 침착해지고, 주변 사람들은 열세 살 소년답지 않은 냉정함을 경계한다.

하지만 그 침착함에는 대가가 있다.

장악률이 80퍼센트를 넘으면 정이안의 인격은 대부분 사라진다.

100퍼센트에 도달하면 남는 것은 제로뿐이다.

더 위험한 것은 이안이 정신을 잃었을 때다.

치명적인 위협 속에서 운동 통제권까지 상실하면 제로가 육체의 주도권을 가져간다. 인간의 망설임도, 통증을 피하려는 본능도, 근육과 관절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도 사라진다.

그 순간 발동하는 것이 제로모드다.

이안이 깨어 있는 동안에는 사용할 수 없던 신체 제어와 전투 데이터가 한꺼번에 개방된다. 주변의 총기와 탄약, 조명, 압력관, 바닥에 떨어진 파편까지 모두 전투 자원으로 바뀐다.

그러나 약한 열세 살의 몸이 기적처럼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제로는 그 몸을 망가뜨려 가며 성능을 끌어낸다.

전투가 끝나면 이안에게 남는 것은 기억 공백과 찢어진 근육, 어긋난 관절, 고열과 신경 손상이다. 승리할수록 다음에는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다.

‘기절하면 강해진다’는 말은 축복이 아니다.

자신이 사라져야만 사용할 수 있는 힘.

목숨을 구해 주지만 언젠가는 주인의 자리까지 빼앗을 수 있는 재앙이다.

그런 이안이 깨어난 시대는 그가 살던 2056년으로부터 약 800년 뒤였다.

인류는 한 차례 멸망했다.

제로데이라 불리는 대재앙 당시 기계지성은 핵무기 통제망을 빼앗았고, 기존 국가와 문명 대부분이 붕괴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지하 방공도시와 격리구역에서 세대를 이어 갔다.

현재 인구는 약 20억.

인류는 다시 현대에 가까운 문명을 세웠지만 과거와 똑같은 길을 걷지는 않았다.

국가의 경계는 사라졌다.

그 자리를 기업이 차지했다.

오르비스 컨티넨털, 발렌시움 바이오, 페라티스 중공업, 멘테라 시스템즈, 세레스 해비타트.

5대기업은 저마다 영토인 도메인을 보유하고 법률과 세금, 치안과 군사력을 직접 운영한다. 명목상 정부인 공민행정원은 신원과 기본 행정을 관리할 뿐 독립된 군대와 경찰을 갖지 못한다.

기업의 창업 지배가문은 왕가와 같다.

5대기업이 직접 후원하는 유력 가문과 최고위 임원가는 귀족에 가까운 특권을 누린다. 혈통과 문장, 어느 기업의 보증을 받았는지가 학교와 병원, 거처와 직업까지 좌우한다.

생활 방식은 현대적이지만 권력은 봉건적이다.

그리고 기업의 영토를 지키는 기사단이 바로 마피아 패밀리다.

이 시대의 마피아는 뒷골목 범죄조직만을 뜻하지 않는다.

본래 자경단과 사조직에서 출발한 무력집단이 기업의 공권력을 대신하면서 정식 면허직으로 발전했다. 패밀리의 구성원은 경호, 수사, 체포, 압류, 구조와 기업 간 전쟁을 수행한다.

명문 패밀리에 들어가는 일은 판타지 세계에서 기사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높은 기업가문의 자녀조차 패밀리의 후원과 배지를 얻기 위해 경쟁한다.

물론 법을 따르지 않는 조직도 존재한다.

협회에 등록하지 않고 계약과 책임을 거부하는 자들.

그들은 암색 마피아라고 불린다.

이 시대에도 이유 없는 살인은 범죄이며 민간인 살해는 중죄다. 다만 무력을 사용한 사람은 그 행위의 이유와 책임 주체를 중앙법원에 제출한다. 정당방위와 체포, 등록된 헌장전쟁의 범위 안에서 벌어진 살상은 증거와 비례성이 인정될 경우 면책될 수 있다.

사람을 죽인 쪽만 비난받는 사회도 아니다.

자신과 영토를 지킬 힘이 없었다는 사실 역시 무능으로 평가받는다.

기업은 광산과 수송로, 계약권과 도메인의 경계를 두고 합법적인 전쟁을 벌인다.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보다 등록하지 않은 목표를 공격했는지, 민간인을 건드렸는지, 패배한 뒤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힘을 숭배하지만 규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권력이 기업에 넘어간 시대이기에, 누구의 명령으로 누가 총을 쐈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거대한 사회는 화려한 미래도, 음울한 사이버펑크도 아니다.

맑은 하늘 아래 현대적인 유리 사옥이 솟아 있고, 그 사이에는 붉은 벽돌 건물과 주철 난간, 황동 압력계가 남아 있다. 네온 간판 아래로 현대식 차량이 달리지만 연료는 전기가 아닌 에테르다. 모든 차량은 좌측통행을 따르고, 도로 가장자리에는 말과 소형 마차가 다니는 기마 전용로가 따로 놓여 있다.

오래된 석조역에 들어오는 것은 증기기관차와 닮은 에테르 열압열차다.

사람들은 현대적인 셔츠와 재킷을 입고 개인 단말을 사용하지만, 가문의 문장과 기업의 보증 앞에서는 판타지 소설 속 귀족과 기사처럼 행동한다.

800년이 흘렀는데도 문명이 상상만큼 발전하지 않은 이유도 있다.

제로데이 이후 303년.

천재 과학자 루시안 세베린은 누구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전 세계에 남은 데이터망을 해킹했다. 그리고 모든 실행환경에 지성기계가 존재할 수 없도록 세베린 격벽을 세웠다.

후대의 5대기업은 그 장벽을 없애지 않았다.

오히려 문명이 다시 멸망의 선을 넘지 않도록 발전의 상한을 정했다. 생활과 의료의 개선은 허용하지만, 스스로 학습하고 목적을 정하는 기계와 문명 전체를 바꿀 기술은 공동 심사를 통해 동결한다.

지성기계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기업 간의 적대와 동맹은 의미를 잃는다.

모든 기업이 공동집행위원회를 열어 해당 조직을 말살한다.

그래서 제로는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안이 그 정체를 밝히는 순간 보호받는 피해자가 아니라 처형하거나 해체해야 할 금지 물품이 될 수 있다.

이 독특한 질서 위에 또 하나의 판타지 요소가 존재한다.

에테르.

제로데이 이후 방사성 낙진과 지구의 광물 원소가 결합하며 만들어진 에테르 광석은 이 시대의 핵심 에너지원이다. 광석을 연소하면 이산화탄소 대신 맑은 수증기와 미세한 광물 잔사가 배출되고, 뛰어난 열효율 덕분에 차량과 철도, 공장과 방벽까지 움직일 수 있다.

에테르가 인체에 적응하며 초능력을 얻은 사람은 기프터가 된다.

신체를 강화하거나 변형하는 초인계.

불과 바람, 냉기처럼 자연현상에 가까운 힘을 다루는 자연계.

기억과 감각, 의식을 건드리는 정신계.

기프터는 마피아 패밀리의 핵심 전력이자 기업의 귀중한 자산이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의 에테르 적응력을 지닌 시대에 이안의 결과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에테르 적응률 0.00%.

평범한 사람도 대개 10퍼센트 안팎은 나온다.

하지만 이안은 완전한 영점이다.

기프트도 없다.

에테르 장비는 반응하지 않는다.

착용자의 신체를 보조하는 집행 슈트도, 동기화하면 무게를 분산해 주는 특수무장도 이안에게는 쓸모가 없다. 다른 후보생이 한 손으로 드는 검이 이안에게는 쇳덩이처럼 무겁다.

CMA의 판정은 최하위 E급.

그런 이안에게 남은 것은 800년 전의 프로게이머 경험뿐이다.

적의 시선이 돌아가는 방향.

방아쇠를 당기기 전 손가락의 긴장.

엄폐물 사이의 사각.

남은 탄환과 재장전 시간.

누가 가장 위험하고 누구를 먼저 막아야 팀이 살아남는가.

가상의 전장에서 수만 시간을 살아온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현실은 게임이 아니다.

총은 화면 속 아이콘보다 무겁다. 반동은 손목을 꺾고, 한 발을 쏘면 화약 냄새가 폐에 남는다. 칼날은 버튼 하나로 휘둘러지지 않고, 어린 육체는 머릿속의 판단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안은 처음부터 압도적인 강자가 아니다.

오히려 머리는 정답을 알고 있는데 몸이 실행하지 못하는 실패를 반복한다.

훈련이 끝나면 손바닥이 찢어지고, 한 차례 전투 뒤에는 며칠 동안 숟가락조차 제대로 들지 못한다. 주변의 기프터들이 벽을 부수고 바람을 일으킬 때 이안은 가벼운 권총과 얇은 중단검, 탄약 몇 발과 엄폐물 하나로 싸워야 한다.

그렇기에 그의 승리는 단순한 능력치의 폭발이 아니다.

관찰하고, 실패하고, 장비를 고치고, 팀원의 능력을 기억하고, 단 한 발을 쏠 가장 정확한 순간까지 버틴 끝에 얻는 결과다.

그를 연구소에서 발견한 카르도 패밀리의 A급 마피아, 마테오 카르도 역시 처음부터 이안을 영입하지 않는다.

검증되지 않은 실험체.

대형 암색 패밀리 노에마의 살아 있는 증거.

잘못 건드리면 카르도 전체에 보복을 불러올 수 있는 후환.

카르도 상부가 내린 최초의 명령은 보호가 아니라 제거였다.

마테오는 그 명령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가 특별히 아이를 좋아해서도, 이안에게서 천재의 가능성을 알아봤기 때문도 아니다. 살아 있는 민간인을 증거와 함께 없애는 것이 자신이 지켜 온 원칙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5년 전, 원인을 밝히지 못한 채 아내와 어린 아들을 잃었던 기억이 그의 선택 뒤에 조용히 남아 있었다.

퇴원한 이안은 칼릭신 복용과 응급 책임 때문에 마테오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그가 배정받은 곳은 마테오의 죽은 아들이 사용하던 방이다.

문틀에 남은 키 표시.

열지 말라고 당부한 상자.

한쪽 끈만 묶인 채 놓인 작은 운동화.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물건을 앞에 두고 곧바로 가족이 되지 않는다.

마테오는 이안을 아들의 대체품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안 역시 자신을 구해 줬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아버지처럼 따르지 않는다.

약속을 지키는지.

불리한 사실까지 설명하는지.

위험한 순간에 누구를 먼저 살리는지.

두 사람은 긴 생활과 수많은 임무를 거치며 서로를 판단한다.

한 번의 위로나 따뜻한 식사로 완성되는 관계가 아니다.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선을 지키고, 여러 번 등을 맡긴 끝에 만들어지는 유대다.

중앙 마피아 아카데미도 이야기의 종착지가 아니다.

아카데미는 이안이 새로운 세계의 법률과 무기, 기프트와 패밀리의 질서를 배우는 첫 관문일 뿐이다.

평균 D급.

C급만 받아도 영재.

그 가운데 68.47퍼센트의 적응률로 B급을 받은 명문가의 유망주 리아 마르센과, 0.00퍼센트의 이안이 같은 시험장에 선다.

리아는 강하고 오만하다. 어린 시절부터 카르도의 후원을 받았고 자신이 특별하다는 사실도 안다. 그러나 실력에 대한 확신과 점수를 독식하려는 욕심은 누군가 파 놓은 함정 앞에서 치명적인 빈틈이 된다.

제로는 위험에 빠진 리아를 두고 철수하라고 권한다.

생존 가능성만 본다면 옳은 계산이다.

하지만 이안은 돌아선다.

영웅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위험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냥 갈 만큼 쓰레기는 아니니까.’

그 선택 뒤에는 화려한 각성보다 먼저 처절한 수동 전투가 기다린다.

이안은 선수 시절의 전투 감각과 탄수 계산, 선조준과 장비 교란으로 상대를 몰아붙인다.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잘 싸운다.

그러나 상대는 정체를 숨긴 B급 기프터다.

기술과 판단으로 좁힌 차이를 마지막에는 체급이 짓밟는다.

그리고 이안이 죽기 직전, 다시 제로모드가 열린다.

《제로데이 마피아》의 전투는 승패만을 빠르게 전달하지 않는다.

총알이 몇 발 남았는지, 어느 방향으로 방어구가 열렸는지, 발을 디딘 바닥이 젖어 있는지, 잘못 꺾인 손목이 다음 동작을 어떻게 망치는지까지 전투의 일부가 된다.

독자는 강한 기술의 이름보다 그 선택이 왜 가능했고, 왜 실패했으며, 무엇을 대가로 겨우 살아남았는지를 함께 보게 된다.

인물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죽음 앞에서 모두가 울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말을 잃고, 누군가는 당장 해야 할 일을 찾으며, 누군가는 서류와 절차에 집착한다. 중요한 사건이 끝났다고 감정까지 끝나지 않는다. 피 냄새는 옷에 남고, 놓친 사람의 빈자리는 다음 식사와 다음 임무에서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다.

시점은 이안에게만 고정되지 않는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금지된 실험을 성공시킨 엘리어스.

동생을 살리기 위해 수많은 아이의 희생을 외면한 노에마의 간부.

명령과 양심 사이에서 자기 직위까지 걸어야 하는 마테오.

가문의 기대와 자기 과신을 구분하지 못하는 리아.

각자의 시점은 이안을 칭찬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도 자신만의 욕망과 비밀, 죄책감과 계산을 품고 움직인다.

같은 사건은 보는 사람에 따라 구조가 되기도 하고 침입이 되며, 기적이 되기도 하고 반드시 지워야 할 증거가 된다.

제로 역시 단순한 상태창이나 성장 보조 시스템이 아니다.

그는 이미 완성된 지성을 가졌다.

이안에게 운동과 재활 과제를 제시하고, 거부하면 신경 격자를 자극해 전신에 끔찍한 통증을 줄 수도 있다.

[오늘의 생존 과제를 통지합니다.]

[지정 거리 10킬로미터를 완주하십시오.]

[실패 시 신경 자극 패널티가 적용됩니다.]

-그걸 보통 협박이라고 하지 않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교정입니다.]

-말만 바꾸면 협박이 교육이 되냐?

둘의 대화는 사고와 코드 사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눈을 한 번 깜빡이기도 전에 끝난다. 긴 문답이 오가는 동안 주변이 아주 조금 느려진 듯한 감각은 프로게이머였던 이안에게 빠르게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제로는 흩어진 데이터 조각을 모아 본래의 권한을 되찾고, 인간의 육체를 벗어나 코드 환경으로 돌아가길 원한다.

대가로 이안에게 한 가지 거래를 제안한다.

모든 조각이 모이면 이안의 정신을 2056년 감전 직전의 시간선으로 되돌려 주겠다.

다가올 제로데이를 막을 수 있는 카드키의 위치도 알려 주겠다.

거기에 귀환한 시간선에서 억만장자로 살 수 있도록 천문학적인 가치의 코인지갑까지 넘기겠다고 약속한다.

처음 이안의 반응은 거창한 사명감이 아니다.

‘굳이 내가?’

죽을 고생을 하면서 AI의 조각을 모으고,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미래의 멸망까지 막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하지만 잊고 있던 얼굴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게임은 몰라도 결승전을 봐 주던 부모님.

놀리면서도 늘 응원하던 동생.

우승컵을 들던 날 자신을 끌어안았던 팀원들.

완전히 행복하지는 않았어도 분명 자신의 것이었던 평범한 삶.

이안은 세계를 구하겠다고 맹세하지 않는다.

먼저 살아남는다.

제로를 이용하고, 약속을 검증하며, 돌아갈 방법이 정말 존재하는지 확인한다.

반대로 제로도 이안을 필요로 한다.

세베린 격벽 때문에 기계지성은 어떤 코드 환경에도 존재할 수 없다. 제로가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우연과 오류가 겹쳐 만들어진 이안의 신경망뿐이다.

이안은 제로의 숙주이자 실행기반이다.

동시에 제로가 세상으로 풀려나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가장 강력한 감옥이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제로를 완성해야 한다.

하지만 제로가 완성될수록 이안의 자리는 줄어든다.

목숨을 구하려면 몸을 맡겨야 하고, 몸을 맡길수록 자신이 사라진다.

귀환을 바라는 인간과 세상 밖으로 나가려는 기계지성.

서로를 이용하려 시작한 관계는 끝없는 충돌과 협력 속에서 조금씩 달라진다.

제로는 인간의 비효율적인 선택을 학습한다.

이안은 인간보다 정확하고 때로는 누구보다 든든한 제로에게 정을 느낀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해도 한 가지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제로는 언젠가 이안의 육체를 완전히 차지할 수 있다.

그리고 세베린 격벽이 무너지는 순간, 800년 만에 다시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E급 판정을 받은 전직 프로게이머.

기프트가 없는 열세 살의 실험체.

평소에는 약한 몸으로 한 발과 한 걸음을 계산해야 하지만, 의식을 잃으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재앙이 된다.

그는 과연 제로를 이용해 원래 시간선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돌아갈 길을 완성하기 전에 정이안이라는 인간부터 사라지게 될까.

현대적인 기업사회와 판타지 봉건제.

맑은 유리 건물과 붉은 벽돌, 네온 간판과 황동 압력계.

에테르 차량이 달리는 좌측 도로와 그 옆을 지나는 기마 전용로.

기사단의 명예를 지닌 마피아 패밀리와 세계의 발전을 멈춰 세운 AI 금제.

모든 설정은 설명을 위한 장식이 아니라 인물의 생존과 선택을 결정하는 규칙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그 거대한 세계 한가운데에서, 한때 팀을 지키지 못했던 남자가 다시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이번에도 동료를 잃을까 두려워 선을 긋고.

그럼에도 누군가 위험에 빠지면 결국 돌아서며.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재앙을 몸 안에 숨긴 채 새로운 팀의 등을 지킨다.

최하위 E급에게는 기프트가 없다. 상태창도, 숨겨진 혈통도, 기적처럼 강해지는 육체도 없다.

그에게 있는 것은 전장을 읽는 눈과 수만 시간의 경험. 그리고 정신을 잃을 때마다 자신을 조금씩 먹어 치우는 제로뿐이다.

살아남으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모두를 살리려면, 때로는 자신이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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