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 계단 앞에 검은 차가 섭니다.
골목 아이들이 몰려듭니다. 이 동네에 저런 차가 들어오는 건 빚 받으러 오는 사람뿐이니까요.
차에서 내린 사람은 언덕 위 빨간 벽돌집의 박 여사.
이 동네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반지하 문턱에서 반찬가게 아줌마에게 먼저 머리를 숙입니다.
“도현이 어머니시죠. 인사드리러 왔어요.”
그리고 방석에 앉자마자 보자기를 풉니다.
통장이 쏟아집니다. 16권.
“나머지도 봐 달라고 했지. 약속대로다.”
아홉 권은 박 여사 이름. 일곱 권은 친척과 아는 사람 이름.
“세금 때문에 나눠 둔 거다. 다들 그렇게 한다.”
묻기 전에 대답하는 사람은, 그 질문을 여러 번 받아 본 사람입니다.
도현은 대답하지 않고 일곱 권을 날짜순으로 넘깁니다.
조카 명의 통장에서 손이 멈춥니다.
매달 25일, 30만 원 출금.
도장 재발급 두 번.
박 여사가 전화기를 듭니다. 도현은 메모지에 숫자를 적어 그 손 옆에 밀어 둡니다.
지난 삶, 금융감독원 조사실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쪽지를 넘기던 방식으로.
“고모님도 참. 손도 안 댔어요. 걱정 마세요.”
박 여사가 메모지를 읽습니다.
“25일마다 30만 원.”
“아, 그거요. 관리하느라 든 이자 조금 쓴 거예요.”
손도 안 댔다가, 이자만 조금이 됐습니다.
첫 번째 거짓말에서 두 번째 거짓말로 넘어가는 데 5초.
“이자는 몇 번 받았냐.”
“몇 번이요? 그게, 두세 번……?”
“15번이다.”
수화기 너머가 길게 빕니다.
“450만 원. 내일 아침 9시까지 통장이랑 도장 다 가지고 와라.”
화를 내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오히려 낮아집니다.
이 집 돈이 왜 20년 동안 줄지 않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통장에 한 줄이 더 있습니다.
석 달 전부터 매달 5일, 5만 원 자동이체. 받는 쪽 이름은 새빛가정상담회.
약정서는 한 번도 재촉하지 않던 그 선생이, 통장 하나에는 이미 손을 넣어 두었습니다.
5만 원은 돈이 아니라 길입니다. 한번 뚫린 길로는 나중에 3억이 지나갑니다.
박 여사는 조카의 통장 위에 그 통장을 겹쳐 놓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도현이 처음으로 부탁합니다.
“저한테 돈을 빌려주세요. 1억이요. 엄마 이름으로 빌리고, 이자 드릴게요.”
“13살이 1억을 빌려 달라.”
박 여사가 보리차 잔을 손가락으로 돌립니다. 계산하는 손입니다.
“빌려주는 건 아이가 아니라 판단이다. 판단이 맞는지는 아직 두 번 봤다. 세 번째를 보고 주마.”
[이 작품의 재미]
- 주인공은 숫자를 적어 줄 뿐입니다. 거짓말을 끝내는 건 돈 주인의 목소리입니다.
- 악역은 한 번에 크게 오지 않습니다. 매달 5만 원, 길부터 냅니다.
- 큰손은 아이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습니다. 판단에 빌려줍니다. 그래서 맞힐 때마다 판이 커집니다.
- 곗돈 300만 원에서 실명제, 외환위기, 닷컴, 리먼을 지나 재벌이 되기까지.
[연재 정보]
- 무료 연재입니다. 1화부터 바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선호작을 눌러 두시면 다음 화를 내 서재에서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재미있으셨다면 좋아요도 한 번 부탁드립니다.
검색창에 ‘금감원 에이스’를 넣으시면 나옵니다.
이 장면은 6화 「열다섯 번이에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