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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커버를 씌우지 않을 책
rmfdlwhgek·2025.11.06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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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스마트폰 때문에 거의 사라진 풍경이지만 예전엔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책을 꺼내 읽는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그럴때 남들이 보기에 조금 민망한 책이거나 너무 유치하고 자극적인 내용이라 스스로 부끄럽게 느껴지는 책에는 예쁜 종이나 천으로 만든 북커버를 씌워서 책표지를 가리곤 했었죠.


반대로 '나 이런 책도 읽는 수준 있는 사람이야.' 라고 보이고 싶은 경우엔 당당하게 표지를 펼치고 보란듯이 세워 들었습니다. 물론 심취한 듯한 표정을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고요. ㅎㅎ


이 작품이 책으로 나왔다면, 저는 아마 주저 없이 표지를 드러내고, 살짝 우쭐한 기분으로 읽었을 것 같아요.


정말 오랜만에 읽는 내내 감탄하며 스크롤을 내릴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무턱대고 스토리를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야기의 토대를 차곡차곡 쌓고, 견고한 뼈대를 세운 뒤, 그 위에 풍성한 살을 붙이는 식이죠.

그런데 그 뼈와 살이 워낙 정교하고 탄탄해서, 독자는 저항할 틈도 없이 빠져듭니다.

저는 그 점이 정말 좋았습니다.


특히 개연성과 핍진성에 허술한 작품을 견디지 못하는 편인데, 이 작품은 그 부분에서 완벽했습니다.

게다가 장르는 SF이고 배경은 미래이지만 철학서라고 불러도 될 만큼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에요.


간단하게 내용을 소개하자면,

멸망한 폐허 위에 다시 문명의 싹을 틔우고 아둥바둥 살아가는 세상을 배경으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주인공 '한'은 연방 수사관인데 어쩌다 살인사건에 얽히게 되고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점점 스케일이 커지더니 나중엔 세계를 지탱하는 권력자들에까지 닿게 됩니다.

이런 점진적인 이야기는 제가 너무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


처음 40화까지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건이 펼쳐지는 과정이 진행됩니다. 그 과정에서 인물의 깊이와 그들이 사는 세상을 친절하게 보여주는데 저는 그런 부분이 특히나 좋았습니다.

데니스 루헤인의 냄새가 슬쩍 묻어나는 인물의 깊이 표현이나 레이먼드 챈들러의 색깔이 얼핏 비치는 공간감도 좋았고, 제임스 코리의 익스팬스가 떠오르는 SF 리얼리즘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어지는 70화까지의 부분은 본격적으로 스토리의 골조가 세워지고 여기저기 뿌려놓았던 퍼즐의 조각들이 자리를 맞춰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독자들의 섣부른 예측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퍼즐이 끼워져서 그림이 만들어지나 싶다가도 금세 '그건 아니었군' 하는 탄식이 터져나오게 돼요.


70화 이후부터는 기어가 바뀝니다. 이야기가 폭발하듯 가속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기준 86화까지 읽은 제 감상으로는, 이제 정말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재미있는 소설이 아닙니다.

한 인간이, 문명이, 그리고 신이라는 존재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묻는 철학적 SF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물음에 독자 스스로 답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지만, 중간에 이런 대사가 등장합니다.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이 오히려 재앙이 되어 돌아오는 장면에서 '한'이 이렇게 위로하죠.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고 하죠.

때로는 좋은 의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도 있더군요."


그 대목에서 저는 읽기를 멈추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과거에 겪었던 불운한 일들과 자책의 기억이 떠오르며, 스스로를 조금은 용서할 수 있었달까요.

그건 제 노력이 부족했거나 잘못된 선택을 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세상의 구조가 그렇게 흘러갔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위로였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북커버를 씌우지 않을 책’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자신 있게 들고, 남들에게 추천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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