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웹소설 시장에서 정통 판타지를 만나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첫 화부터 반갑습니다.
빠른 전개와 즉각적인 사이다 같은 공식 대신 긴 호흡으로 세계를 구축하고 서사를 쌓아가는 방식은 1990년대 후반~2000년대 판타지 황금기의 향수를 자극합니다. 요즘 기준으로 불친절해 보일 수 있는 이 정공법이 오히려 작품에 대한 깊은 신뢰를 더합니다.
1. 베르세르크의 계보를 잇는 주인공 아벨
주인공 아벨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신의 역사를 기록하고 진실을 수호하던 가문은 ‘신의 계시’라는 이름 아래 하루아침에 멸망했습니다. 교단에 들어가 좋은 동료들을 만났지만 임무 수행 도중 동료마저 잃습니다.
아벨은 자신을 덮친 모든 불행은 우연이 아니라 '신의 의도'라고 믿습니다. 죽어도 상관 없단 식으로 살아왔던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죽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의 비극을 유흥처럼 내려다보고 있을 절대자를 향해 조롱하듯 선언합니다.
"악마라도 상관없다. 저 오만한 신에게 단 한 방이라도 먹여줄 수 있다면, 내 영혼이든 육체든 기꺼이 가져가라"고.
생존을 위해 악마와 계약했다는 점에서 [베르세르크]의 그리피스가 떠오르지만 그 궤적은 그리피스와 정반대입니다. 베헤리트 목걸이를 마주한 그리피스는 운명을 수용한 인물에 가깝습니다.
아벨은 운명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계약을 택한 인물입니다. 이 지점에서 아벨은 그리피스보다 의지의 인간인 가츠와 닮았습니다.
아벨의 계약은 욕망이나 야망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대로 아무 선택도 못한 채 죽지 않겠다'는 저항입니다. 신의 유희로 전락하는 대신 신이 짜놓은 판을 깨부수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그의 타락을 쉽게 비난할 수 없습니다.
2. 두 종류의 '계시'와 흐려진 선악의 경계
작품 고유의 설정도 독창적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건 '계시'의 이중성입니다. 작중에선 신의 뜻을 전하는 도구와 인간의 의지를 교묘히 조작하는 힘 모두 '계시'라고 불립니다. 신도 악마도 같은 방법을 쓰되 명분만 다를 뿐입니다.
이 설정 하나로 신과 악마의 경계는 흐려집니다. 신의 계시가 축복이 아니라 인간을 짓밟는 폭력으로 작동하는 세계에서 주인공이 악마를 선택하는 건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선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독자는 “그렇다면 무엇이 옳은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3. '소울류' 게임을 탐험하는 듯한 재미
작가는 떡밥 뿌리는 것에도 능합니다. 교단, 까마귀, 붉은 보석, 얼굴 없는 자들까지— [다크소울] 같은 소울류 게임을 즐기는 독자라면 이 작품의 서사 방식에 매료될 것입니다. 세계관은 치밀해 보이지만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주인공 아벨처럼 독자 역시 제한된 정보 속에서 세계의 진실을 직접 파헤쳐야 합니다. 설명 대신 배경과 사건으로부터 떡밥을 수집하듯 이해하게 되는 로어 중심 구조는 이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탐험하는 것’에 가깝게 만듭니다.
묘사도 섬세해서 공들인 티가 납니다. 특히 악마의 힘을 빌려 기괴하게 부풀어 오른 '얼굴 없는 괴물'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입니다. 괴물은 적인 동시에 감당하지 못한 힘과 선택의 결과물처럼 보입니다.
아벨도 악마와 계약한 만큼 언제든 괴물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베르세르크나 소울류 게임 속 존재들처럼 이는 굴복했을 때 도달하게 될 말로에 가깝습니다. 이를 묘사하는 작가의 필력은 긴장을 자아냅니다.
4. 영웅 서사를 거부하는 '의지'의 판타지
아벨은 세상을 구원하거나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거창한 목표 따위 없습니다. 그가 끝까지 붙잡는 것은 단 하나, 적어도 자신의 삶만큼은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유행을 쫓는 양산형 서사에서는 느낄 수 없는, 베르세르크 계보를 잇는 원형적인 다크 판타지의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회귀·빙의·환생의 시대, 우리가 잃어버린 '근본의 맛'을 찾는다면 이 작품을 추천합니다.
올해 읽은 작품 중 가장 뒷이야기가 궁금해진 작품입니다. 현재 작가님의 건강 문제로 연재가 잠시 멈춰 있지만 기다릴 가치가 충분한 이야기를 만난 것 같아 기쁩니다.
독자 수와 상관없이 공지를 성실히 올리고, 독자를 존중하는 태도에서 작품에 대한 애착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작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부디 건강하시고 평온하시길 바랍니다. 다시 이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