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물은 내가 모르는 분야의 사람들이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걸 엿볼 수 있는 장르라서 즐겨 읽는 편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루이틀이지 특정 분야에 대한 작품을 서너개쯤 보고나면 들어봤던 분야의 사람들이 들어봤던 이야기를 하는 장르가 되어버려서 한동안은 손이 안가더라구요.
그나마 사정이 나은 연예계물 작가물 같은 경우는 직종의 특성상 핍진성에서 상당히 자유로워서 아주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전개될 수 있어서 쉽게 질리지도 않던데,
반대로 사정이 아주 어려운 의료물은 레퍼런스가 아주 깐깐하게 정해져있고 어지간한 상황은 이미 앞선 작품들에서 다뤄져있던 경우가 대부분이 됩니다.
하지만 웹소설 시장의 원동력이 되어 주는 독자들 중 상당수는 소위 그밥의 그나물(...)이어도, 아주 사소한 계기만 있다면 물리지도 않고 또 따라가곤 하면서 시장을 블루오션으로 만드는 데 한몫 하고들 계시죠.
저도 재미만 있으면 그밥의 그나물이어도 잘만 먹는 부류라서, 의료물을 한 열 질은 읽은 것 같은데도 별 거부감 없이 이 작품까지 술술 잘 넘어가더라구요.
서론이 긴 이유는 의료물에서 뭐 대단히 새로운 걸 기대하는 건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있으니 이미 여러 의료물을 접해보신 독자들께서는 참신하고 새로운 글을 찾으시는 경우 그리 어울리지 않을것이라는 짐작을 남기고자 함이었습니다.
하여 이번에 추천해드리고 싶은 글은 의료물에 첨가할만 첨가물들 중에 가장 답이 안나올 것 같은... 코믹(?)함을 한스푼 풀어놓은 글입니다.
병들고 다쳐서 고통받는 사람들만 잔뜩 나오는데 거기서 코믹함이 나올 구석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또다른 국밥장르인 착각물을 더하니까 어라 이게 되네...? 하는 준수한 하이브리드가 탄생한 것 같더라구요.
그렇다고 착각물에 너무 치중해서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를 지들끼리 떠드는 아조씨들 엿보는 재미가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힐러각성자를 데려다놓고 의사라고 우기면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전개를 감당하라고 강요하는 종류의, 명함만 빌려온 의료물은 아니더군요.
제공되는 환자 케이스들도 많이 진부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새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신경써서 준비된 희귀병 메뉴들이었어요.
케이스를 진행하는 것 역시 원패턴이 되기 쉬운 술기쪽이 아니라 진단쪽에 비중이 큽니다. 주인공이 아직 병아리다보니 나중엔 술기도 다룰 것 같아요.
제가 의사가 아니라 무슨소릴 하는 지는 하나도 모르겠지만, 일단 그럴듯하게 말하는 내용들이 감상하는 데 몰입이 깨질 정도로 허술하게 되어있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착각물로서의 장치도 잘 설계되어 있어서 심정지가 일상인데도 결국 마지막엔 피식 웃게 됩니다.
주인공이 아주 매력적으로 설계된 덕분인데, 우리가 늘 만나던 천재형 주인공이지만 아주 공감하기 쉬운 귀염터지는 허세병자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더라구요.
이친구는 분명 자칫하면 재수없게 느껴지기 딱 좋은 초 엘리트의 지성을 가졌지만, 너무나 하찮고 소시민적인 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친구의 열정과 노력은 범접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멀게 느껴지기 쉽지만, 그걸 만들어내는 욕망은 너무나 하남자스러운데다, 행동의 동기는 한없이 사소하지만 따뜻하고, 하찮지만 올바릅니다.
분명 질릴 때 까지 먹어본 그나물의 그밥입니다만,
손에 땀을 쥐고 보다가도 피식 웃으면서 마무리할 수 있는 이 작품만의 재미를 느껴보시길 권합니다.
새해 복 많이들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