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흡입력 있는 첫 화는 성공적인 웹소설의 공식과도 같으며, 그렇기에 수많은 작가들이 독자를 붙들어둘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진 1화를 쓰는 데 사활을 겁니다.
쏟아지는 고유명사, 난해한 외부 관찰자 시점의 서술, 그리고 관심이 가지 않는다면 떠나도 좋다고 서술자의 입을 빌어 작가가 직접적으로 고하기까지 하는 이 작품은, 그래서 언뜻 보면 이 공식을 지키는 데 완전히 실패한 실패작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소 난해하고 정적인 시작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은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확실한 보답을 약속합니다.
흡입력 있는 서사를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작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투자해준 독자들의 시간을 결코 허투루 쓰지 않습니다.
난해한 세계관과 고유명사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윤곽을 견고히 해나가고, 널뛰기하던 시점은 점차 안정을 찾아갑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은, 입체적이고 살아 숨 쉬는 등장인물들입니다.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보이던 캐릭터들은 이야기가 진행되며 점차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 그 캐릭터에 대한 독자의 인상 또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강하지만 무뚝뚝한, 전형적인 '쿨찐' 캐릭터로 보이던 주인공 미나이 칼쿤은, 죽음꾼에 대한 정보가 차차 공개됨에 따라 그 정체성에서 비롯된 냉정함과 무감정함,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랙 유머를 포함한 (본인은 부정하지만)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수다스럽지만 무자비한 강자라는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던 듯한 아홉은, 그보다 한 수 위의 강자와의 싸움으로 잔혹한 손속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인간미와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걸 독자들에게 일깨워줍니다.
단순무식한, 그래서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 중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던 우즈만은, 그를 옆에서 관찰하는 미나이의 시선, 그리고 그의 과거사가 드러나면서 다채로운 면을 가진 복잡하면서도 호감 가는 캐릭터로 변모합니다.
말더듬이에 외팔이, 거기에 불에 그을린 얼굴까지 더해 어떠한 외적인 매력도 갖추지 못했다고 작가가 못 박는 듯한 엠나르는,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그녀의 내면을 관찰할 수 있는 독자들에게 그 매력을 한껏 뽐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캐릭터들이 서로 엮이고 어우러지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까지 하니, 지켜보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됩니다. 또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까, 어떤 밝혀지지 않은 과거사가 또 다른 면모를 드러내게 될까, 하고 말입니다.
어쩔 수 없는 단점으로, 이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미 평범한 웹소설 독자라면 난색을 표할 법한 방대한 분량을 한 화마다 욱여넣고 있지만, 한 화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와 정보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 작품은 독자들이 투자한 시간을 결코 허투루 소비하지 않습니다. 연재 시작부터 지금까지 주6일 연재라는 버거운 일정을 꾸준히 지켜온 걸 보면 알 수 있듯, 비록 느릴지언정 꾸준히 서사와 작품성을 쌓아올릴 것입니다.
만일 이야기가 무르익기까지의 시간을 감내하고, 또 즐기실 수 있다면, 이 작품을 선택하신 걸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거라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