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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모임] 혈검마룡 님의 '소천전기'(자유연재)
노레이션·2003.09.21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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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괄

      

       제 판단으로 '소천전기'는 습작물입니다.

       대개의 습작물은 미숙하게 마련이고,  그것들을 차츰 발전시켜 나

     가다보면 언젠가는 습작물 이상의 세련된 '작품'을  쓰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습작물이 미숙하다는 말은  칭찬은 아니겠지만, 그

     렇다고 비판 역시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소천전기'에서 드러난  습작물로서의 미숙함들은,  단순한

     미숙함 이상의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 미숙함들이 어느 한

     부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스토리 텔링의 기교, 문장의 조율,  등장인물의 역동성, 구성의 견

     고함, 글 속에 내재된 사고의 깊이 등 모든 점에서 습작물 특유의 미

     숙함이 드러납니다.

       더구나 그 정도가 비슷비슷하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커집니다.

       객관적인 수준과는 상관없이,  그 글 자체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특별히 뛰어난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기준으로 잡아 나머지의 뒤

     쳐진 부분들을 끌어올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수준이

     라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방향을 정하기 힘들  수밖

     에 없습니다.

       그 작가의 장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글은 있을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중요한 건, 남보다 뛰어난 한  가지의 특별한 재능을 중심으로 다

     른 부분들은 평범한 수준 이상만 유지한다면, 그는 충분히 '작가'라고

     불리울 만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한 가지가 작가의

     개성적인 색깔을 만들고, 나머지 부분들은 그 색깔을 보위하는  배경

     색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처음 글을 쓰더라도, 적어도 한 가지만큼은 자신만의,

     남보다 잘 할 수  있는 독특함을 마련한  뒤에 시작해야 합니다. 그

     독특함이 그가 앞으로 쓸 모든 글을  선두에서 이끌어나가는 것입니

     다.

       저는 이 비평문을 쓰기 전에, 비평신청 된 '소천전기'의 원고를 세

     번에 걸쳐서 읽었습니다. 한 번의 정독, 한 번의 간독, 그리고 마지막

     에 또 한 번의 정독.

       그 이유는 바로 위에 언급한 작가만의 특징을 무엇으로 삼아야 할

     지를 발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그 특징이 없다면, 이는 작가로서의 재능이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정확하고도 보편적인 판단을 내

     리기에 저의 시야는 너무나 일천하고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독선적

     이기까지 합니다.)

       그 세 번째에 이르러서야 저는  비로소 가느다란 끈 같은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비평문을 씁니다.

      

       먼저, 비판입니다.

      

       1. 스토리

      

       제가 읽은 분량까지의 스토리를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 후일 있을 신마의 전쟁을 앞두고 '천무지체'를 타고난 아이를 찾

     으라는 자연선인의 말과 그  제자들(?)의 대화에서 이야기는 시작됩

     니다. 그리고 곧이어 장면이 바뀌면서, '천무지체'인 소천이 태어나고,

     자연진인의 제자들 중 하나인 남궁철이 그  아이를 신선문으로 데려

     갑니다. '하필이면' 남궁철은 소천의 외조부가 됩니다.

       신선문에서 자라던 소천은 '우연찮게' 천무지체 특유의 병적기질을

     쾌유하게 되고, 무예를 익힙니다. 그리고, 십 칠세 되던 해에  신선문

     밖으로 나가 한 두가지 일을 겪고, 돌아온 뒤에 이십 세가 되자 다시

     밖으로 나갑니다. 이십 세가 되어 몸을  회복하고 나면, 부모님을 찾

     아가기로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도중에 정도맹, 마도맹등과 인연을  맺고, 천마혈교의 고수들

     과도 싸우게 됩니다. 그리고 '우연찮게' 사촌형제들을 만나고, 격전중

     에 도주하다가 '우연찮게' 찾아든 어느  오두막에서 아직까지 어쩌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파멸안'을 고치는 동시에 무공이 급증하게 됩니

     다... -

      

       비록 구무협의 전형적인 '운명론'을 차용하기는 했지만, 스토리 자

     체에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사실 그 어떤 스토리도 그 자체만으로는

     문제를 제기하기 힘들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어차피 소설이란 사람의 이야기이고, 그것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

     었다' 라는 한 문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태어나

     고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가'...그 '어떻게'  를 만드는 건 작가

     만이 가진 신성불가침의 특권입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잘못는  비난

     해도, 인생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는  것처럼, 작가가 만든 스토리도

     타인으로서는 뭐라 말할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위의 스토리 요약에서 굳이 따옴표까지 찍어서 강조

     했던 '하필이면' 과 '우연찮게'는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사실 세상의 어떤 인생이, 어떤 이야기가 '하필이면'과 '우연찮게'의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더구나 무협은 애초부터  '영웅

     의 일대기'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영웅에겐 보통 사람 이상의 운명

     과 우연, 기연들이 집중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운도 실력이다' 라는 말처럼, 모든  우연과 기연에는 나름

     의 타당함도 있어야 합니다. 소설에서, 그것은 '일관성'에서 나옵니다.

       요즘 '개연성'이라는 어휘를  흔히 사용하는데,  그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모순의 배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에서 이러하다고 설정했다면, 뒤에서 그 설정을  지켜야 합니다.

     앞에서는 이렇다고 해 놓고, 뒤에 와서  느닷없이 '사실은 저런 것이

     다' 라는 식의 자기모순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모든 우연과 기연은 그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이루

     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연은 납득되고,  기연은 필연으로 전환됩니

     다.

       특히, 구룡신단 이외에는 세상의 그  어떤 수로도 살릴 수 없다는

     소천이 단순히 침 몇 대 맞고 살아나고, 나중에는 '등잔밑이  어둡다'

     라는 식으로 바로 살고있던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설화음양살마

     진'이란 걸, 그것도 우연히(사부와 사백의  장난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이 역시 억지스런 우연일 뿐입니다) 한 번 통과한 걸로 갑자기 건강

     해지는 전개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듭니다.

       또한 전개 중반에 느닷없이 등장한 '파멸안(매혹안)'의 아이템(?)도

     당황스럽습니다. 이전까지는 그에 대한 어떠한 복선도 없다가 갑자기

     파멸안이 등장해 눈을 마주치기만 하면 모든 여자가 넋을 잃고 달려

     들거나, 남자들은 살기에 주눅이 들거나 합니다. 게다가 이 파멸안도

     우연히 찾아든 외딴 집에서 발견한 책을 보고 수습합니다.

       가장 중요한 주인공,  그 주인공의 가장  중요한 상태변화를 단지

     어설픈 우연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스스로 붕괴되기 시작합

     니다. 기둥이 무너지니 주변에 세워진 모든 이야기의 골격들이  덩달

     아 긴장을 잃고, 방향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420쪽(가림토 화면), 원고지 천여장 이상이  전개된 현재까

     지 '소천전기'의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습니다. 몇 개의 의미없는 에피

     소드를 길고 자세하게 나열하면서 훌쩍훌쩍 건너뛰는 식입니다. 향후

     전개될 이야기의 복선도 아니고, 그 자체로 짜임새 있는  에피소드도

     아닙니다.

       소설의 스토리는 단순한 이야기 얼개만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 내부에 하나의 일관된 질서와 흐름을  부여해야 비로소

     소설의 스토리가 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소천전기'는  단지 하나의  막연한 이야기만을 근거로

     시작한 뒤에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덧붙이고 짜맞춘 듯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야기의 전체를 다  완성한 뒤에 글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써나가는 도중에 보충하고 수정해야 하지요. 하지만,  적어

     도 한 가지만은 반드시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어떤 관점에서 서술할

     것인가? 내가 이 이야기를 빌어 말하고 싶은 나만의 것은 과연 무엇

     인가?'

       그것이 이야기의 질서를 기초하고, 흐름을 만들어 냅니다.

       어쩌면, 글을 쓰는 '혈검마룡 님' 본인 조차도 '소천전기'의 향후 전

     개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2. 문장

      

       문장은 소설의 외형적인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우선, 문장의 1차적 의미인  표현도구로서에 대해서 말해보겠습니

     다.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어휘력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소설에 쓰이기 어색한 단어들(완연한  구어체적인 단어)이

     흔히 사용되고, 그렇다고 제대로 쓰고자 노력한 문어체 역시  부자연

     스럽습니다. 소설의 문장에 익숙하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습작의 경

     험이 적을 뿐만 아니라, 독서의 경험도 그리 많지 않은 듯 합니다.

       특히, ...했단 말인가? 식의 화자를 알 수 없는 질문식의 문장이 자

     주 등장합니다.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제가  과거의 80년대 무협을

     더 이상 읽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저러한 문장들 때문이었습

     니다. 그야말로, 소설 외적인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작품 뒤에  숨

     어서 등장인물들을 통해서만  들려줘야 할 이야기에서  갑자기 작가

     자신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려오면, 그 순간 '깨' 버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문장은 작가의 시선을 표현합니다.

       이 장면을, 인물을 어떤 시선으로 어떻게 바라보는가...마치 영화에

     서 카메라 구도를 신경쓰듯이 글을 쓸 때면, 그 문장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합니다. 똑같은 장면을 표현하더라도,  똑같은 사건을 서술하더

     라도 거기엔 작가만은 의지가 서려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가만의 색이고, 그 작품만의 개성입니다.

       그러나, '소천전기'의 시선은 대단이 평범합니다.

       마치 '롱 테이크', 처음부터 끝까지를 하나의 고정된 카메라만으로

     찍어낸 것처럼 밋밋할 뿐입니다.

       확대할 곳은 확대하고, 지나칠 부분은 지나치고, 앵글을 바꿀 곳은

     바꿔주고, 빠르거나 느리게 조절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 위에 작가만

     의 독특한 가치관을 얹어서 함께 표현하는 것입니다.

       '소천전기'에서는 그런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3. 인물

      

       일단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성'입니다.

     그리고 그 개성은 언행과 일치되어야 하고, 크게는 이야기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더욱이 무협의 인물은 극단적으로  개성적이어야 합니다. 무협 자

     체가 극단의 자극을 지향하는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피와 죽음과  배

     신과 강간 따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극단적으로

     인상적이지 못하는 인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개성이 있다면, 그  개성이 강할수록 그를 표현하기가

     쉽습니다. 그것도 짧고 단순한 문장만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주인공인 '소천'을 비롯한 사부격인 신선문의 제자들, 뒤이

     어 등장한 마도맹의 사람들, 무림세가의 후계자들...어느 누구도 개성

     적이지 못합니다. 모두가 무던한  정도, 혹은 이미  여타의 무협에서

     일반적으로 등장한 인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사의 역전은 언제부터인가 청소년 독자들을

     겨냥하고 내세운 어설픈 풍자의 유행을 고스란히 따랐습니다.

       안하무인이며 무례한 정도맹, 의리가  있고 예의바르며 사람 보는

     눈까지 정확한 마도맹. 그럼 왜 정도맹이고 왜 마도맹인지  모르겠습

     니다.

       아마도 기성세대를 정도맹으로, 청소년기의 세대를 마도맹으로 설

     정한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면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만, 같은

     설정이라도 그 이면을 받쳐주는 가치관이 체계적이지 못하다면, 철없

     는 투정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4. 기타

      

       A.

       '소천전기' 읽으면서 가장 곤혼스러웠던 것은, 하나의 사건이 진행

     되는 중간이 갑자기 문장과 분위기가 달라지고, 심지어는 사건  자체

     가 단절되기도 했던 점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이것은 아마도 연재때문인 듯 합니다.

       한 꼭지에서 다음 꼭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연재상태에서야 꼭지마다 하나씩 분리해서 읽으니 잘 드러나지 않

     을지 몰라도, 이렇게 하나로 연결해서 죽 읽어나가다 보면 그런 종류

     의 단절은 몹시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제가 '소천전기'를 읽으면서, 습작물이다, 즉흥적이다, 라는  생각이

     든 가장 큰 이유가 이것입니다.

      

       B.

       무공에 대한 설정이 또한 습작물의 전형입니다.

       화경, 현경, 생사경의 순서로 나가는 무공은 과거  묵향 이래로 꾸

     준히 차용되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곳곳의 무협관련 게시판에 '화

     경, 현경, 생사경의 차이를 알려주세요' 라는 식의 질문이 많이  있기

     도 했지요.

       하지만, 제 생각에 그러한 무공의 분류는 소설창작의 자유를 빙자

     한 근거없는 말장난일 뿐입니다.

       이는 마치 바둑을 둘 때, 1단은 2단을 못 이기고,  2단은 3단을 못

     이긴다, 라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1단과 9단이 맞두는 건

     왜일까요? 9단의 조훈현 씨가 고작 3단이었던 이창호 씨에게 번번이

     패했던 이유는? 그 이창호 9단이 3단의 이세돌에게  또 패하는 이유

     는? 실재 무술로 봤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태권도 1단은 2단과의

     대련에서 절대 못 이길까요?

       비록 소설에서의 창작은 전적으로 작가의 자유재량이지만, 기본적

     인 재료는 현실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화경, 현경...같은 단계적  구

     분을 나누는 건, 현실의 무술에 대한 자료조사를 귀찮아 한 나태함의

     결과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소설은 상상의 이야기이지만, 전적으로 상상으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의 현실을 기반으로  꿈을 꾸는 것,  그것이 소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 최소한의 현실마저 알지 못한다면, 소설을 쓸

     자격이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무조건 화경, 현경..식의 설정이 부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의미로 보자면 똑같은  현상을 지칭하는 화경,  현경..이지만, 만약

     작가 자신이 정신적인, 관념적인 뭔가를 구분하기 위해서 사용했다면

     기꺼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사용하기 전에, 그 정신

     적인 토대를 받쳐줄 철학의 습득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5. 하나의 장점.

      

       혹여 '혈검마룡' 님이나, '소천전기'를 즐겨  보시던 분들이 보자면,

     지금까지의 제 비평이 너무 심하다, 너무  독랄하다, 라고 눈을 찌푸

     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약 이제부터 언급할  '하나의 장점'을 결국 발견하

     지 못했다면, 저는 적당히 순화된 말로 적당한 칭찬과 비평을 섞어서

     두루뭉실하게 써내고 말았을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말하는가에 상관없이 스스로가 한계를 느끼고 글쓰기

     를 그만둘 테니까 말입니다. 단 하나의 장점도 없는 평이한 글을  쓰

     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글(소설)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할 수밖에 없

     습니다. 그러니, 이왕이면 서로 좋게좋게..라고 적당히만 하고 말았겠

     지요.

       따라서 제가 지금까지 참혹하리만치 비판한 것은 오로지  이 하나

     의 장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래서 적어도 앞으로는 지금보다 향상

     된 수준으로 발전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때문입니다.

       '혈검마룡' 님은 '작가'가 '작품'과 두어야 할 거리를 본능적으로 깨

     닫고 있습니다.

       이 역시 제 개인적인 견해이겠지만,  작가는 그 자신이 쓰는 작품

     에 절대 몰입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는 마치 창조주가 이 세상에 몰입

     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주는 다만 적당한  거리에

     서 조망하며 어긋난 부분들을  수정하는 역할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만약 그가 이 세상속으로 몰입해버린다면, 그는 신의 능력을 지닌 한

     인간에 불과한 존재로 타락하게 될 뿐입니다. 다른 인간들처럼  화내

     고 슬퍼하고 기뻐하겠지요. 그럼 그 하나의 감정 때문에 세상 전부가

     휘둘려야만 하고, 결국에는 멸망할 것입니다.

       작가와 작품과 관계도 이와 같아서,  작가는 작품을 관조할 수 있

     는 거리 이상으로 몰입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집중'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글쓰기에서의 집중이란 작품으로가 아닌,  그 작품의 근원이 되는

     작가 자신의 상상력에 대한  집중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집중될 때,

     작가는 그 상상력과 작품 사이의 통로가 되어, 막연한 상상을 구체적

     인 현실(작품)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개의 습작가들을 보면, 습작하는 작품이 무언가에 따라 그 상태

     가 변하고, 반대로 그의 상태가 어떤가에 따라 작품의 분위기가 변하

     곤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도 글을 쓴다. 그러니까 작가다' 라

     는 환상에 도취되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합니다. 그 흥분이 글에 고스

     란히 드러납니다. 내가 쓸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쓰게 되고, 내가 충

     분히 쓸 수 있는 것도 기성 작가의 흉내를 내려다가 망치고 맙니다.

       '소천전기'를 읽는 동안에 저는 '혈검마룡 님'은  적어도 이러한 이

     치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세 번이나  되풀이

     해서 읽었던 것은 그 느낌을 좀 더 확실히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작품과의 거리를 아는 사람이 쓴 글에서는 어떤  종류의 일관성이

     느껴집니다. 작품의 내적인 흐름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관성이지요.  

       요컨데, 이 작가가 작품을 쓸  때의 태도가 언제나 일관되고 있구

     나, 하는 느낌인 것입니다.

       그러한 일관된 태도는 작가에게 매우 중요한 재능입니다.

       적어도 소설쓰기에 대한 제 가치관에 따르면 그러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소설 쓰기는  '상상력의 세계를 떠도는 이야기들이

     나를 매개로 현실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 이야기들과 접속할 수 있는  상태(Epiphany : 직관의 현현,  영감

     (靈感)의 조우)를 유지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혹은, 그럴  수 있

     는 능력을 타고나야 합니다.  마치 영매나 무당처럼  말이지요. 제가

     흔히 '글쓰기는 일종의 신내림이고 저주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생각 때문입니다.

       하나의 작품을 처음으로  쓰면서도, 그것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배우거나 알아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나와 작품 사이

     의 거리'를 알기 때문이고, '나는 작가라기보다 일종의  대리서술자이

     다' 라는 것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기교는 배울 수 있습니다.

       소설의 이론도 경험으로 체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재능은 배울 수도, 체득할 수도 없습니다.

       비록 강렬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저는 '소천전기'를 읽으면서 그

     재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6.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은 글쓰기의 수련입니다.

       다독과 다작이 최고이고 최선의  방법이다, 라는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 저는 바둑이 5급에서 6급 사이입니다.

       바둑을 둔지 10년 가까이 되었지요.

       한 때 나가던 기원에서 60 넘은 할아버님들과도  자주 두었더랬습

     니다. 그 분들 중 몇 분은 저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제가 두어 점을

     접어주기도 했지요. 그 분들은 거의 30년 이상 바둑을 두어온 분들이

     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6단인 기원 원장님은 저보다 고작 두 살 많은 형님일

     뿐이었지요.

       그저 두어온 판수만으로 따진다면,  제아무리 열심히 했더라도 30

     년 이상 두어온 분들이 서른 남짓의 젊은이에게 아홉 점으로도 견디

     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건, 다독과 다작 이면에는, 먼저 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정석과 행마에 대한  이론을 먼저 배우고,  그것을 연습하는 식의

     바둑을 두어야 실력이 늡니다. 제가  18급에서 7급까지 오르는 데는

     육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7급에서 더 오르기까지는 3

     년 가량이 걸렸고, 그 이후로는 여전히 바둑을 두는데도 오히려 점점

     치수가 낮아졌지요. 지금은 어쩌면 7급도 채 안될런지도 모릅니다.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단순한 반복적 연습은 한계가 있습니다. 바둑으로 치자면, 6-7급까

     지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 연습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방향에  따르지 않으면, 설령 한 평

     생을 노력한데도 절대 그 이상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6-7급의 실력...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칭찬받을 실력일  뿐,

     전문가와는 격을 재볼 수도 없습니다.

       만약 '혈검마룡 님'께서 스스로의 재능을  키우고 싶다면, 먼저 체

     계적이고도 끊임없는 공부를 하시길 권합니다. 그럼 비약적인 발전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소천전기'에서 혈검마룡

     님이 너무나도 자주 썼던 단어처럼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니까요.^^

      

       부디, 지금까지의 비평에 언짢아하기보다는, 혈검마룡 님의 가슴속

     에 '어디, 두고보자' 라는 오기가 솟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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