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한재국은 한때 시청률 30퍼센트를 넘긴 국민 드라마를 썼지만, 이제는 이름 자체가 ‘위험 요소’가 되어 버린 작가 퇴물 작가입니다.
연이은 실패 끝에 아내에게 이혼을 통보받고, 마지막 작품마저 후배 작가에게 각색을 맡기라는 굴욕을 당합니다. 결국 제작사와의 계약까지 끊긴 채 쓰러진 그에게 ‘퇴물 작가의 인벤토리’가 열립니다.
설정만 보면 익숙한 작품 획득형 시스템물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의 진짜 재미는 따로 있습니다.
한재국은 인벤토리에서 명작을 얻었다고 곧바로 성공하지 않습니다. 완성된 작품이 왜 재미있는지 이해하고, 자신의 낡은 집필 방식을 돌아보며, 제작 현실에 맞게 대본을 재구성합니다. 남의 작품을 받아 적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망가졌던 작가로서의 감각을 하나씩 되찾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집니다.
특히 첫 작품인 '왕의 요리사'가 단순한 성공 도구로 소비되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배고픔을 잊은 왕에게 음식을 기다리게 하는 장면, 독살의 공포로 밥을 먹지 못하는 아이와 함께 죽을 끓이는 장면처럼 작중작 자체에도 사람을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덕분에 주변 인물들이 대본에 빠져드는 모습이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독자 역시 그들이 왜 다음 원고를 기다리는지 충분히 납득하게 됩니다.
가장 통쾌한 대목은 한재국이 ‘한도경’이라는 필명으로 대본을 투고한 뒤부터입니다. 회사의 가장 낮은 투고함에서 시작한 작품이 막내 사원과 담당 PD, 팀장, 대표에게 차례로 올라갑니다. 모두가 작가의 정체를 모른 채 작품을 인정한 다음에야 그것을 쓴 사람이 자신들이 버리려던 한재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름이 있을 때는 읽어 보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이름을 지우자 먼저 다음 원고를 요구하는 아이러니가 상당한 대리만족을 줍니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성공작 하나를 얻자마자 거만하게 복수만 외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실패와 잘못은 인정하되, 필요할 때 버렸다가 다시 가치가 생기자 붙잡으려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먼저 버린 쪽은 당신들입니다.”
10화까지 쌓아 온 한재국의 변화가 있었기에 이 한마디가 더욱 시원하게 꽂힙니다.
몰락한 전문가의 재기, 작품으로 증명하는 인정 서사, 업계 사람들의 태도가 뒤집히는 순간을 좋아한다면 추천할 만한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앞으로 인벤토리에서 어떤 명작들이 쏟아지고, 한재국이 그것들을 통해 어디까지 다시 올라갈지가 기대됩니다.